신해혁명과 독립운동가 김규흥

조 대 기 본지 편집국장

 경제규모로만보면 대한민국은 세계10위권의 선진 경제강국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적으로 놓고볼때는 미-중-러-일의 주변 4대강국에 둘러싸인 반도국이다. 국제정치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분단국이다. 이념적으로 남북으로 분단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토대로 하는 중국과 자본주의 대국인 미국의 정치 경제적 변동에 휩쓸리지 않을수 없다. 미국과 중국 두나라는 세계를 이끄는 G2국가다. 2009년 미국은 우리에게 군사동맹을 넘어 ‘21세기형 포괄적 동맹국’으로 됐지만 중국은 우리에게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 그치고 있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또 북한이 있어 우호협력이 맘대로 안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로서는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 번영앞에서 중국을 최대한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때문에 중국도 나서야겠지만 우리로서도 양국 우호협력 증진을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중요하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교류협력은 이제 규모와 영향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크고 가깝다. 이같은 추세는 향후에도 더욱 확대되고 교류와 협력은 친밀도 차원에서도 더 깊어질 공산이 크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사실을 잊고 살때가 많다. 또한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하거나 등한시해서 역사가 왜곡되기도 하고 잘못 이용되기도 한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규정짓기 때문에 중요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라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수있게 된다면 아주 둥요한 국가적, 국제적 문제가 된다.
 올해는 중국의 신해혁명100주년 되는 해다. 1911년 10월10일 무창에서 손문 등 중국동맹회가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두차례의 혁명이 있었지만 위안스카이의 독재로 혁명은 실패했다. 그러나 무창에서 최초로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중화민국(대만)에서는 국경일인 ‘쌍십절’로,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민주공화정이 세워진 것은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1차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 정부가 만든 임시약법과 우리 상해임시정부가 만든 임시헌장의 유사성에서 확인할수 있다. 임시약법 제1장 제1조에는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주권재민의 원칙을 선언하고 제2장에서는 “중화민국의 인민은 모두 평등하여 종족 계급 종교의 차별이 없다.”고 인간의 평등권을 약속하고 있다.
이같은 주권재민과 평등권 조항의유사함은 상해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과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함”이란 조항에서 볼수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임시정부 수립이 1911년 있었던 중국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기 어렵다.
 이 1차 혁명때 중국동맹회 동지들과 교류하며 혁명에 참여한 한국인 김규흥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밝혀졌다. 김규흥은 고종 비자금 조칙을 받고 상해에 가서 무관학교 설립계획을 추진했다가 상해에서 진형명, 당소의 등 혁명인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무관학교 설립계획을 이유로 김규흥은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른 뒤 1908년 3월 광동으로 망명했다.
김규흥은 망명이전부터 이미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다. 공화주의자 김규흥이 신해혁명 주도세력 손문 진형명 등 중국혁명동맹회와 인연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11년 10월 무창봉기가 발발하자 그는 신해혁명에 참여하고 혁명정부의 도독부총참의 겸 육군소장을 맡는다. 김규흥은 2차 혁명에도 참여하지만 혁명실패후 박은식 등과 함께 홍콩으로 망명했다. 김규흥은 1913년 홍콩에서 발간된 최초의 한중합작 언론인 ‘향강잡지’의 축사에서 자유 민주사상을 설파하기도 했다. 김규흥은 상해임시정부 설립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등 중국에서 주도적으로 한민족 독립운동 후원, 조종자 역할을 했다.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1차혁명에 참여한 인사가 신규식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증거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김규흥이 혁명군 소장, 고문관 등을 역임하는 등 혁명의 성공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혁명동맹회의 중심인물인 추노(대학총장 및 국민당 고위직 역임)가 1945년 10월, 중경에서 발행된 중앙일보를 통하여 한국의 광복을 축하하며 기고한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과 인연을 맺은 것은 40년 정도인데, 조선에서 온 반가운 친구 한 사람이 남방종사혁명 초기에 참가하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고 김범재(김규흥)이다. 제1차 신해혁명 이후 김 동지는 광동성 정부의 고문직에 임명되었다.”
일제에 항거해야하는 상황, 같은 처지에 있지만 중국의 혁명 성공이 한국의 독립에도 영향을 줄수 있다는 방책차원에서 신해혁명에 육군소장으로 가담해 지대한 도움을 준 사실,이를 고마워한 중국 혁명동지의 한국 광복을 기념해 축하 글을 쓴 선린의 우정은 후손들이 기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는 5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리는 ‘한중 호혜학술토론회’는 신해혁명과 한국 독립운동가 김규흥의 역할과 의미를 되새긴다. 당초 중국에서는 올해를 공산당 창건 90주년과 함께 100주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칠 계획이었으나 내부동요,시위를 억제하기 위해 민간주최 학술토론회와 연극 등을 막는 등 엇갈린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열리는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두나라간 이해와 협력을 넓히는 계기로 삼는 것은 물론 선린우호로 동북아 및 세계평화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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