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신 마을’이라고 있다.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 마을에 가 본 적이 없다. 마을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안 오신 마을’이다.

입동을 지나면서 그 마을로 가는 길목의 나무들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하여 내부 수리 중’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있다. 자세히 읽어보면 어느 가게에서 점포를 정리한다는 소식이다. 한 시절을 보낸 나무가 또 다른 시절에 닿기 위해 스스로 내부를 수리한다는 말 같아서 나는 일부러 자세히 읽지 않고 지나다닌다.

나무는 겨울을 받아들일 채비를 하는 중이다. 지난 시절 동안 풍성하게 이루어 놓았던 그늘을 한 겹씩 지우고 있다. 현수막은 펄럭이며 그 작업을 거들어 준다. 나무의 그늘을 단칼에 찍어내려는 듯 칼바람을 타고 마구 펄럭이기도 한다. 마지막 한 잎까지도 알뜰히 떨어내야 겨울을 온새미로 품을 수 있다는 걸 현수막도 아는 것 같다.

새로움에 닿기 위해선 익숙한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익숙한 것들을 비운다는 것은 스스로 내부를 수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진 가게가 점포 정리를 하는 것도, 리모델링을 하는 것도, 익숙한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사람들의 발걸음을 다시금 ‘오시게’하기 위해서이다. 익숙하다는 말은 식상하다는 말의 포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에 더 끌린다. 계절마다 몸살을 앓는 것도 알고 보면 몸이 새로운 계절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리 하는 것이다. 한바탕 수리가 끝나면 몸은 거뜬하게 계절을 나곤 했다.

한때 개그 프로에서 ‘그분이 오셨습니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무대에 선 개그우먼이 팔을 크게 벌리고 그분이 오셨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웃을 준비를 했다. 요즘은 쇼핑을 할 때 ‘지름신’이 오셨다고 한다. 지름신이 오시면 사람들은 지갑을 열고 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오신다는 말은 어떤 존재를 내 안으로 불러들인다는 말이다. 신(神)만 강림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의 무지(無知)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들은 다 나에게로 강림하시는 ‘어떤 존재’이다. 오신 마을로 가는 길목의 나무를 통해서 나는 어떤 존재를 본다. ‘내부 수리’는 그렇게 나에게로 오셨다. 아무런 준비 없이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저 나무들이 일깨워주고 있다.

현수막이 펄럭이며 나무의 그늘을 떨어낼 때마다, 내 안에 열없이 쌓여 있는 식상한 것들의 그림자가 지레 움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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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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