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창문을 여는 버릇이 있다. 아파트 생활에서 창문을 열어젖힌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닌데도 창문을 열면 눈곱이 쉽게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에 밴 훈련으로 눈을 감고도 열 수 있는 창문이었지만 오늘 아침에 열어젖히는 창문은 힘겨웠다. 누군가 하얀 설탕 가루를 잔뜩 뿌려 놓은 듯 밤새 서리가 내린 모양이다. 어느새 서리가 내렸다니……후덥지근하고 끈적거려 주야로 거추장스럽던 더위가 며칠 새 맥없이 주저앉았다가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이는 것은 인심의 이간질인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했다.오늘은 화원에 들러 노란 국화꽃 화분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출근길에 나섰다. 퇴근 무렵 한동안 뜸했던 친구의 전화를 받고 가벼운 저녁 식사 약속을 했다. 그 친구는 나를 보자 잘 지냈느냐는 말 대신 손을 덥석 잡았다. 친구의 마음을 아는지라 나도 그저 씩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면서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다 보니 우리 나이에는 흉내를 내는 것조차 힘들다는 얘기와 가진 사람들의 능력과 못 가진 사람들의 고초를 밥술 위에 올려서 몇 번 씹어대다가 남은 국물을 벌컥 삼켜버렸다.평소 절약하며 살던 친구가 어느 틈에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손짓을 하면서 다가서자 친구는 말없이 내 어깨를 꾸욱 눌러 왔다. 친구의 손바닥 체온에서 뭔가 나누고 싶은 대화 거리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친구는 그런 모습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수다스런 말보다 따뜻하게 전해주는 체온으로 마음속에 감춰둔 말을 대신하는 친구, 고단함에 지쳐 어깻죽지가 낮아진 사람을 보면 가만히 다가가 등을 감싸주는 따뜻한 손을 가진 그였다.참으로 이상한 것은 특별한 위로의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친구의 손이 닿으면 편안하고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다정해진다는 것이다.“저 찻집은 사계절 국화차를 잘 달여 낸다고 소문난 집이라네‘ 자리를 잡고 마주 앉게 되었는데 친구의 안색이 금세 안 좋아 보여 다른 곳으로 갈까 물었으나 괜찮다고 대답하는 친구의 속내를 읽느라 찻잔만 돌리고 있었는데,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사연인즉 며칠 전 친구의 아내가 국화꽃 화분을 옮기다가 허리를 삐끗하여 누워있던 사람에게 “당신이 청춘이야! 왜 혼자 그 무거운 화분을 방안으로 옮기고 난리야!”라고 했단다.아내는 계절 바뀌는 것도 모르고 이틀을 하루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남편에게 국화꽃 향기라도 맡아 보라는 배려에서 화분을 옮기다 허리를 다쳤고, 가만히 누워있어도 끙끙거리던 중에 억울한 소리를 듣게 되자 치료는커녕 며칠째 냉랭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부엌 밥통에서도 김밥 터지는 소리가 멈췄다고 한다.친구의 처지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허리를 다친 아내가 안쓰러워 속내를 감춘 채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의 처지에서 보면 허리 아픈 것보다 마음을 다치게 한 남편이라 꼴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나는 평소 듬직했던 친구가 아내와의 갈등에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여자의 마음은 호수와 같이 고인 물이라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생수도 되고 폐수도 된다네. 그래서 상처를 주었다면 썩어 악취가 나기 전 물꼬를 터야 하는데 그때 쓰는 남자의 유일한 연장이 손이라네. 특히 자네는 특별한 손의 힘을 가진 사람이니 오늘 집에 들어가면 아무 말 하지 말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손을 꼬옥 잡아주게, 그리고 마음이 내키면 아픈 곳을 여기저기 찾아보게. 그러면 아마 다친 마음도 나아질 것이야.’라면서 화해의 방법과 위로를 곁들여 아는체해주었다. 친구는 여전히 자신이 없어 하면서 그전에도 자주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내가 토라지면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이제는 힘이 부친다고 했다.“아무 생각 말고 손만 믿게, 그 손이 약손이라네.”라며 헤어졌다.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살아가는 부부의 삶은 기기묘묘하여 알다가도 모를 일이 날마다 벌어진다. 그래서 음양학(陰陽學)이 태동되었나 보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순역(順逆)하는 명리학의 일간론을 보면 체용(體用)설이 있다. 이 이론은 체는 근본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며,용은 작용 또는 현상과 파생적인 나타남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예기(禮記 - 정현 著) 서문에서 ‘마음을 통제하는 것을 체라 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행하는 것을 용이라 한다’고 하였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실시간으로 나타남과 이지러짐 즉 음양의 역易(변화)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부부에게도 이처럼 체와 용의 변화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그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말로 상처를 주었다면 스킨십으로 풀어야 회복이 빠르고, 주먹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말로서 용서를 구하여야 화합이 되는 이유도 음양지화(陰陽之和)의 기운이라고 본다. 프로필수필가KBS 안동방송국 FM ‘아침의 광장’ 매주 목요일 『행복 비타민』 작가 역임 대정크린 대표저서: 『행복 비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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