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전의 일이다

서울시 공무원 공채 시험을 보았는데 국어문제에 ( )는 백행의 기본인가? 라는 문제가 나왔다.

( )를 메우는 문제였는데 나열된 예제가 인,의,효,예,신이라는 오지선다 문제였다.

나는 그 중 효를 찍었고 그 결과는 정답이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시작한 공직 생활은 세월이 흘러 퇴직을 한 지도 3년이 넘었다.

총각시절 같은 직장의 동료 여직원을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아이들을 키워야 되기에 시골의 어머님이 오셔서 키워 주셨다.

어쩔수 없이 농삿일을 하시던 어머님은 사정에 못 이겨 오셔서 아이들을 키워 주셨고 지금도 어머님께 눈물겹도록 고맙고 감사하다. 어머님은 아이들이 중학교 가기까지 봐 주시다 서울에 계속 계셔 달라는 우리 부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골에 가셨는데 같이 계시는 동안에도 평균 두달에 한번씩은 시골에 가셨다.

농사일을 하다 오셔셔 아이들을 봐 주시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계시는 것 같았다

남에게 농사를 주시라 해도 막무가내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주관하셨다.

그런데 시골에 가실때는 이것저것 배낭에 넣어 꼭 배낭을 메고 다니셨다

손가방에 무엇을 넣어 들고 다니시기 불편하시기에 배낭을 애용하셨다.

어머님은 시골에 계실때는 홀로 일인 오역으로 암소를 키우고 밭농사,논농사 일을 하고 가게를 보시 매주 담배를 타러 가고 연로하신 아버님 병수발까지 하셨다.

정말 성실과 근면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셨다.

이웃집 할머니는 어머님을 여장사라 하신다. 남자들도 못 하는 일을 부지런하게 감당하셨으니 말이다.

나는 어머님께 시골에 가지 말고 다 정리하고 서울에 같이 살자고 하였으나 ‘아이들이 크고 나면 가야지’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변치 않으셨다.

어느날 시골에 가신다고 하시길래 그러시면 일본 오사까 친척집을 방문 겸 여행을 한번 하자고 해서 일본 친척집에 같이 다녀왔다. 그것이 어머님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 여행이었다

세월은 흘러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나도 공직을 은퇴했다. 퇴직 후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며 어머님이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메시던 그 배낭을 메고 다닌다. 손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오랜 습관임에도 배낭 가방을 메니 참 편하다.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와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다녔다

가끔씩 돌아보면 고인이 되신 형님과 노후를 보내고 계시는 형수님에게도 큰 감사가 된다.

형수님 밑에서 공부한 그 시절이 얼마나 감사했는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주위를 보면 배낭을 메고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다.

배낭가방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속에 지나간 옛 시절이 멈추어 있는 것 같다.

약력

강남문인협회 회원

공학박사,기술사,수필가(2013년국제문예등단)

 

저작권자 © 서울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