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보드] ‘태일’ 정운선, “안아주고 싶은 태일, 네 곁에 우리가 있다는 마음으로”

2021-03-30     김희선 객원기자
▲ 배우 정운선이 대학로에서 서울자치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ㅣ 사진 ⓒ 김수현 기자

처음부터 ‘태일’을 응원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정운선은 2021년, ‘태일’과 드디어 함께하게 됐다. 언젠가 함께할 수 있다면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겠다던 결심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듯, ‘태일’과 함께하는 지금은 건강하고 예쁜 사람들과 좋은 분위기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리고 정운선은 그 시간 속에서, 늘 배고파하면서도 “잘했다, 내일도 이렇게 하자”고 스스로를 토닥이는 태일을 생각한다. “그런 귀한 마음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다룬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태일’에서 태일 외 목소리 역을 맡은 정운선을 태일 목소리 역을 맡은 이봉준과 함께 지난 4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태일’은 2017년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8년 우란문화재단에서 짧은 기간 동안 본 공연을 진행했고 2019년 전태일 기념관 개관작으로 선정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 후 약 2년 만에 첫 장기 공연으로 돌아온 ‘태일’은 오는 5월 2일까지 대학로 TOM 극장 2관에서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정운선은 ‘목소리 프로젝트’가 처음 ‘태일’을 무대에 올릴 때부터 지켜봤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정운선은 “ (박)소영 언니(연출), (이)선영이(작곡가), (장)우성 작가님 다 가까운 사람들이고 (박)정원이랑 (김)국희랑 처음 공연할 때부터 응원하고 지지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 시기적으로 함께할 수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누가 되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고 자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초연 때부터 봐온 ‘태일’이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 볼 때마다 정운선은 많이도 울었다. “공연 중에도 그렇고, 연습 기간 때부터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 말고 극에 들어와서, (태일이)그 아름다운 나이에 자신을 던지기까지 삶과 주변, 60년대 생활들에 대해 들여다 보게 되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사이에 정말 아픈 일들이 많았구나, 전태일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리딩하면서 너무 많이 울었고 지금도 중간중간에 눈물이 쏟아진다.”

▲ 배우 정운선이 대학로에서 서울자치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ㅣ사진 ⓒ 김수현 기자

정운선이 맡은 ‘태일 외 목소리’는 이름 그대로 태일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 여공들과 사장 등 그의 주변인들을 모두 연기해야 한다. 그래서 정운선이 집중한 건 태일을 둘러싼 시대적인 환경이다. “불과 50여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과 너무 달라 체감이 잘 안되더라. 어린 소녀들이 욕설을 들으며 일하고, 잠 안 오게 하는 주사를 놓는다고 하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거니까 자료나 유튜브 등 영상, 사진 등을 많이 찾아봤다”고 말한 정운선은 “그 시대 서울 사투리나 유행했던 노래, 관심사, 물가 같은 부분들도 지금과 너무 다르다.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시대고, 내가 이런데 관객들은 더하겠지 싶었다”고 돌이켰다.

“장면 전환이 많고 그 안에서도 시간이 급격하게 변하니까 태일 외 목소리 역할이 쭉 이어줘야 환기나 집중은 물론, 전달도 잘 될 수 있다. 인물로 들어가는 부분들은 장면장면이 끊겨있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화자가 되기도 하고,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관객들이 잘 가져가실 수 있게 하려고 한다”는 정운선의 설명처럼, 매 장면장면 어느 한 인물도 허투루 지나갈 수 없다. “그 인물들이 태일에게 주는 에너지도 너무 중요하니까 다른 걸 생각할 여력 없이, 순간순간의 집중력이 중요하다”고 말한 정운선은 “내가 조금 더 주변 인물들을 잘 해줘야 태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제가 정확하게 여공, 엄마를 해주고 그런 사람들을 해줘야 태일이 정확하게 마지막에 힘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는데 어설프게 갈 수 없어서 농도를 살려야 해서. 그런 부분들을 많이 찾아봤다”고 덧붙였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역할 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울림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창작진과 배우들의 가슴도 먹먹하게 만든다. “운선 누나가 감수성이 풍부하다. 우리가 장난치고 웃고 있으면 저 멀리서 울고 계신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부분인데 깊이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다”는 이봉준의 말처럼, 정운선은 “무심히 던지는 대사들이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며 ‘태일’ 속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는 “열둘, 열셋 되는 소녀들이 매맞고 일하면서 ‘오빠는 대학갈 거’라고 얘기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 그렇지 자기 버스비를 털어서 풀빵을 사주고 밤새 걸어가고선 ‘잘했다, 내일도 이렇게 하자’는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온 걸까 싶어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더라”고 덧붙였다.

▲ 배우 정운선이 대학로에서 서울자치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ㅣ 사진 ⓒ 김수현 기자

전태일 열사가 서거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관객들은 ‘태일’의 이야기를 보며 뜨거운 감정을 느낀다. 정운선은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뭘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누구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하고 심장으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하며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첫 출근의 설렘처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개개인에게 존재하고 있을 그런 마음을 잘 담아보자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 ‘태일’ 뿐만 아니라 어떤 작품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렇게 투명하게 비춰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뭔가를 더 꾸미거나 잘하려고 하지 말고 진솔하고 진실되게 마음을 잘 담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 극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마음을 대변한 곡이자, ‘태일’이라는 인물이 가장 잘 드러나는 넘버인 ‘잘했다’는 정운선이 꼽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정운선은 “너무 예뻐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사실은 너무 힘들었을 거다. 하루 종일 일하고 굶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까지 걸어가서 잠도 못자고 나오는데 그래도 잘했다고 자기를 다독이고 내일도 이렇게 하자, 내 동생 닮은 애들한테 잘하자는 그 마음이 따뜻하고 예쁘다”며 “나는 이미 태일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데, 저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사람이었음 좋겠다 싶을 정도다. 그 장면이 너무 예쁘고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간 사람, 힘들고 지쳐도 언제나 ‘잘했다’고 자신을 토닥이던 ‘태일’. 정운선은 그 어떤 말보다 태일을 그저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초를 켤 때를 비롯해 몇몇 장면들에서 연출님과 ‘너(태일)의 곁에 항상 우리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한 정운선은 “보면 눈물이 날 것 같다. 무슨 말을 하기보다 그저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말로 ‘태일’에 대한 애정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