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리뷰] 버러지는 빛나기라도 하지, 웃음과 쓴웃음 교차하는 연극 ‘빛나는 버러지’

2022-12-14     김희선 객원기자
공연 중인 배우들 (왼쪽부터 배윤범, 황석정, 송인성)

웃어야 하는 장면에서 쉽게 웃을 수 없다. 무심코 웃었다가 쓰라린 자기혐오를 경험한다. 극이 펼쳐지는 120분의 시간 동안 웃음과 쓴웃음이 서로 바통 터치를 한다. 거리두기와 동일시를 번갈아 경험하는 사이, 객석의 '나'는 극이 끝난 뒤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지난해 2021년 ‘극단 햇’의 리딩 공연 이후 ㈜엠피앤컴퍼니가 기획, 제작을 맡아 선보이는 연극 ‘빛나는 버러지’는 유쾌하고 잔혹한 블랙 코미디다. 연극 ‘빈센트 리버’의 작가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필립 리들리가 쓴 희곡으로, 2015년 영국 런던 소호에서 초연돼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극의 구조는 생각보다 간결하다. 온통 새하얀 무대 위 등장한 두 명의 남녀, 질(송인성, 최미소 분)과 올리(배윤범, 오정택 분)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독특하고 기이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러시아 마약상 이웃과,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쥐로 대표되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던 질과 올리 부부는 어느 날 시청에서 날아든 편지 한 장에 인생 역전의 기회를 얻는다. 3베드룸 신축 주택을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미스 디(황석정, 정다희 분)의 제안은 질과 올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다소 수상쩍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공사가 덜 된 집에서 잠들려던 이들 부부는 집에 침입한 노숙자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노숙자의 시체는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에는 질과 올리를 위한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공연 중인 배우들 (왼쪽부터 최미소, 정다희, 오정택)

‘빛나는 버러지’는 전 세계 모든 대도시가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인 주택 대란을 대전제 삼아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능숙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결코 방심할 수 없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 코드와,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질과 올리, 그리고 후반부의 백미 가든파티 장면을 소화해낸 뒤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며 ‘연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올리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들은 질과 올리의 질문이 자신들을 향할 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된다. 가시적인 폭력과 도발은 덜할지 몰라도 메시지를 깨달을 때까지 관객을 두들겨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는 ‘In-yer-face theatre’ 그 자체다.
 
120분의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배우들의 열연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이 극의 강점 중 하나다. 질과 올리를 연기하는 송인성, 최미소, 배윤범, 오정택 4명의 배우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무대 밖 관객들에게 질과 올리의 경험을 전도시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이 후반부로 흘러갈수록, 관객들은 점점 더 질과 올리(가 상징하는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여기에 이 경계를 교묘하게 휘젓는 두 명의 미스 디, 황석정과 정다희가 선보이는 냉엄한 개성이 덧입혀지면 우리는 극이 끝난 뒤 박수를 치며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충분한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우리는 정말 버러지보다 나은 존재들일까? 적어도 버러지는 빛나기라도 하는데 말이다.

연극 ’빛나는 버러지‘는 내년 1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