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맥파문학상 수필 부문 우수상
하기수의 '기억 여행'
그날은 7월의 하늘답게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연로하신 작은 어머니상 소식에 고향으로 향하는 차량 속에서 누나의 과거 여행은 시작되었다. 70대 중반인 누나는 어느덧 50년 전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 서울에서 사시면서 동생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 감회가 새로웠나 보다.
누나는 20대 초반 농업과 어업을 겸하는 시골 마을에서 청춘을 불태웠다. 당시 그때도 너 나 할 것 없이 젊은이들은 도시로 돈 벌러 가서 가사에 보탬이 되던 시절, 젊은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젊은 여성들을 찾아보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누나는 70년대 중반 새마을 운동이 한참 태동할 때 마을 부녀회장을 맡게 되었다. 아침에는 마을 곳곳마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고 가설 영화관이 설치되어 새마을 관련 홍보 영화가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도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며 흥을 돋우어 주던 시절이었다.
누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젊은 20대 초반, 마을 일에 뛰어들었다. 당시 부녀회원들은 50여 명, 무엇보다도 어업도 겸한 마을 사람들이라서 각자 개성이 만만치 않았다. 매사가 그렇듯 처음 시작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동안 모아 둔 돈 한 푼 없이 마을 일을 추진하려고 하니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여러 궁리 끝에 우선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캐서 팔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 먼저 그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당시 부녀회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부녀회를 위해, 마을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니 웃음꽃을 피우며 활기가 넘쳐났다.하지만, 매일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나가 조개만 캘 수는 없는 일, 그래서 생각 끝에 구멍가게를 운영하기로 했다. 구멍가게는 우리 집에 있는 옆방, 말이 구멍가게이 그곳에는 과자 한 박스, 라면 한 박스, 음료수 한 궤짝, 막걸리 한 말, 그야말로 볼품없는 초라한 가게였다.
나는 당시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는데, 학교 수업이 마치면 끝나기가 무섭게 차 시간에 맞춰 누나가 준 주문 명세표를 펴들고 뛰기 시작했다. 그 후 어느덧 부녀회 운영이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더니 당시 같은 업종에 가게를 운영하는 이웃 가게들이 시샘을 하게 되었다. 누나의 사업 수완에 어느 정도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녀회원들조차 시기심이 발동하여 각자 돌아가며 가게를 운영해 보자며 제안함으로서 잘하던 우리 집 가게는 하루아침에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그런 일이 있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일상도 잠시, 부녀회원들은 생각처럼 장사하지 못하게 되자 다시 우리 집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다.
한때는 마을 회관에서 가게를 운영을 하기도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마을 회관에 가 보니 추운 날씨에 견디지 못하고 음료수 병들이 깨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도 그때 안타까워하는 누나의 표정이 사진을 찍어 놓듯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누나는 당시 부녀회 활동에도 정신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밭, 논농사를 짓고 있어 바쁜 일손이 필요할 때인데 일손이 부족하여 가는 곳마다 풀이 무성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몹시 힘겨워 하셨다. 허구한 날 구청 담당자로부터, 면사무소 담당자로부터 호출되었기에. 어린 나는 일손에 큰 힘이 되지 못했지만 깔끔히 정돈된 다른 밭들을 보면서 부럽기까지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누나의 봉사활동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마을 야산에 나무 심기, 지붕 개량하기, 부엌 위생 청결하기, 당시에는 부엌에 음식을 두면 쥐들이 창궐하던 시절이라 부엌 찬장은 우리 마을에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매일매일 변화하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얘기꽃을 피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나는 그런 사업을 쉬지 않고 추진하였다. 또한 부녀회 회관 건립을 할 때엔 부녀회원들은 서로 힘을 모아 다라에 모래를 담아 머리 위에 이고 나르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궂은일이 있듯 모든 일이 순탄치 않았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아침부터 우리 집에 부녀회원이 모여들었다. 단단히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누나와 어머니는 영문을 모른 채 머리채를 휘어 잡히는 일이 발생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날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부녀회장이 오지 않아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누나는 눈물을 훔치며 잘못이 있다면 마을을 위해 일한 것밖에 없는데 그런 이유로 아침부터 이렇게까지 하느냐며 하던 부녀회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까지 하였다. 그때는 그랬다. 마을을 위해 일한 누나인데 저럴 수 있을까?
하루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부녀회 돈을 갈취했다고. 왜 물건들을 싸게 팔고 있는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누나는 그동안 회계장부를 보여 주며 조목조목 해명하면서 자유 민주국가에서 이윤을 적게 받고 파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수사관에게 물었다고 한다. 누나는 조사를 받으면서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했다. 결국 담당 수사관은 응원하는 말로 격려하기에 이르렀고 누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경찰서를 나섰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는 후, 정부로부터 양돈사업 명목으로 지원금을 받아 돼지 100여 마리를 키우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마을에서는 대통령 표창을 받는 쾌거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누나는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이제는 말이다. 고향에 가면 봉사활동 당시 추진하는 일에 앞장서서 반대했던 분들이 그때는 미안했네, 자네가 하던 일에 적극 협조 하지 못해 미안 했네.”라며 누나의 두 손을 꼭 잡는다고 한다.
누나는 그랬다. 언제나 마을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일했다. 작열하는 7월의 뜨거운 태양처럼. 누나의 쉬지 않고 계속되는 과거의 회상이 시골로 가는 길 내내 이어졌다. 못다 한 얘기를 가슴에 품은 채, 누나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젊은 날의 열정이 고스란히 소환되고 있는 듯 활활 타는 용광로 불길처럼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