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리뷰] 유년기에 대한 송덕문,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2024-01-09     박지현 객원기자
▲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토마스 위버 역 최재웅 ㅣ 제공 오디컴퍼니(주)

이 극은 톰이 친구 앨빈과 영영 헤어지는 이야기이다. 또한 한 예술가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인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개의 플롯은 잘 짜인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관객을 단 한 순간도 한눈팔지 못 하게 한다.

톰은 앨빈 켈비의 장례식에서 읽을 송덕문을 작성하며 등장한다. 그는 좀처럼 제일 친한 친구의 송덕문을 써 내리지 못하고 몇 번이나 종이를 구기고 만다. 그것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애도때문이 아니라 송덕문에 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런 톰의 앞에 뮤즈처럼 등장하는 것은 그와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친구 앨빈과의 추억들이다.

앨빈은 엉뚱하고 천진하며 동시에 세상 물정에 어둡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야망이 없는 존재로서 유년기와 그 시기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을 표상한다. 유년기, 즉 과거란 그립고 사랑스러운 기억이면서도 촌스럽고 낡은 것이며 우리가 지독히도 천착하는 대상인 동시에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톰은 앨빈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귀찮아하고, 앨빈과의 유대를 계속 이어 나가면서도 끝내 그를 자신의 현실인 도시로 초대하는 것은 거절한다. 톰에게는 이제 도시에서의 연인과 친구, 팬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생겨나 있다. 톰에게 앨빈이 정말로 가장 친한 친구인지 이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기에 송덕문을 쓰던 첫 장면에서의 톰은 자신 있게 글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앨빈을 단순히 과거로만 치부하기엔 톰의 작품은 그 주제와 소재에서 많은 면이 앨빈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또한 관객은 목도한다. 톰을 도시의 대학으로 보낸 것도 앨빈의 나비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은 단편이며 이후의 작품 역시 앨빈과의 대화에서 얻은 소재로 집필된다. 톰이 앨빈에게서 영감을 얻지 않고 혼자서 무언가를 써 보려고 도전할 때부터 작품의 진행은 이어지지 않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톰은 괴로워한다. 내가 없었다면 작가가 될 수 있었겠느냐고 묻는 앨빈의 목소리는 톰의 마음속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을 준엄한 내적 심판의 목소리일 것이다.

▲ '스토리오브마이라이프' 엘빈 켈비 역 정욱진 ㅣ 제공 오디컴퍼니(주)

한 인간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대부분 유년기에 생성되고 또한 고착되어 그의 기반을 형성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유년기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유년기의 자신 역시 별개의 존재가 아닌 우리 자신이며, 그렇기에 한 인간을 이루는 수천 개의 요소 중의 하나이다. 그런 작은 요소들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바람을 일으키고, 날씨를 바꾸고, 그가 속한 세계를 변화시킨다. 주제나 소재만으로 소설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것을 어떻게 글로써 적절하게 풀어내는가가 바로 작가의 역량이며 곧 톰의 역량이다.

그렇기에 톰은 마침내 앨빈 켈비의 송덕문을 완성하여 그 자리에 선다. 유년기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미화를 지우고 비로소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또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외면하고 외면하던 그 고통스러운 일을 직면하고 끝내 단독자로서 서게 된 톰이 비로소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를 사람들 앞에서 풀어내며 극은 끝난다.

오늘 우리는 앨빈 켈비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또한 톰의 어른 됨, 또는 자신 됨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축하합니다, 톰. 어른이 되었군요. 축하합니다. 당신은 외롭고 결연한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