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리뷰] 윤이선과 서진연이 꿈꾼 다른 선, '일 테노레'

2024-01-30     박지현 객원기자
환상 오페라 박은태(윤이선 역) l 제공. 오디컴퍼니(주)

작품의 등장인물은 흔히 평면적 인물과 입체적 인물로 분류되곤 한다. 전자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중심 성격이 변하지 않는 인물로 고전에서부터 지금까지 선호되고 있는 유구한 주인공의 특징이다. 특히 주인공이 영웅이거나 지도자일 때 그들은 대체로 평면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들이 나오는 작품의 향유자들 역시 그러기를 원하며 때로는 그 인물에게 다른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하기도 한다. 캡틴 아메리카도 가끔은, 알코올이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술 한 잔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날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 그 캐릭터와는 맞지 않는 행동으로 여기며 작가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을 것이다.

이러한 평면적 인물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후자인 입체적 인물이다. 현대극에서의 인물의 특징인 입체적 인물은 말 그대로 사람에게는 3차원의 모습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를 어느 측면에서 보는지에 따라 보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모습도 있음을 의미한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인물의 모습이 변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실제로 그의 행보가 달라졌다기보다는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가능성이 외부와의 충돌을 통해 촉발되었거나, 그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무수한 측면들을 우리가 비로소 목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윤이선은 부모의 기대와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형 윤기선의 그늘에 가려져 자라났고 기선의 사후에는 그저 그의 대신으로 살아가기를 종용당한 인물이다. 이선은 극 초반에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그려지다가 오페라를 만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그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깨달으며 이전과는 반대의 성격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일 테노레>는 윤이선의 일생을 따라가며 때로는 그의 시점으로만 진행될 뿐만 아니라 그 제목에서부터 부제인 ‘조선 최초 오페라 테너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윤이선이 주인공임을 명시하고 있다. 만일 부민관에서의 오페라 무대에서 윤이선에 의해 의거가 행해졌다면 이 극은 그렇게 주인공 윤이선의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박은태(윤이선 역), 박지연(서진연 역), 전재홍(이수한 역) 외 l 제공. 오디컴퍼니(주)

그러나 <일 테노레>는 현대에 만들어진 근대 배경의 이야기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근대인들이며 그들이 일으키는 사건들 역시 근대의 것이다. 서진연은 일제에 의해 부모를 잃고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인물로 현명하고 적극적이며 결단력 있는 인물이다. 또한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며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보다 먼저인 주인공의 전형을 보여준다. 윤이선은 사랑으로 인하여 그 자신을 변화시켰고 마지막 순간 자신의 선택을 바꾸었지만 서진연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손수 가족의 목을 치고 예정된 죽음을 향해 전장으로 뛰어드는 옛 이야기의 무장처럼 마지막까지 자신이 처음부터 보여주었던 모습을 고수하며 대의와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면모를 보인다.

결국 윤이선과 서진연이 꿈꾸었던 선, 당시의 어두운 시대 상황과는 다른 선(善)을 이룬 것은 내내 자신의 선을 고수했던 서진연이며 윤이선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노선과는 다른 오선지의 선(線)을 걷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첫머리에서 서술한 관점에 따라 생각해 보면 <일 테노레>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는 윤이선이되 이면적으로는 서진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노레(tenore)’는 이탈리아어로 남성 성악가의 음역 중 가장 높은 음역대인 테너를 뜻한다. 테노레는 ‘가지다, 붙잡다, 지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tenere’에서 유래한 단어로 멜로디를 쥐고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극의 주인공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명칭이다. 어쩌면 <일 테노레>의 진정한 일 테노레는 서진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