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리뷰] 아비가 아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킬롤로지’
여기, 상대방을 잔인하게 죽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게임이 있다. 누군가의 심장에 총을 쏘아 단숨에 죽이면 1점이지만 그를 질식시키는 동안 잔혹하게 고문을 하면 1,000점을 받는 게임 ‘킬롤로지’. 표면적으로 이 연극은 이 시대에 만연해 있는 비디오 게임의 해악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게임 플레이를 통해 살인을 연습하며,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사실 연극 ‘킬롤로지’는 아비가 아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을 크게 두 측면에서 극단적으로 가정하여 보여준다. 지나치게 방임하는 아비(알란)와 그 아들(데이비), 지나치게 통제하는 아비와 그 아들(폴)의 관계에서 관객은 이러한 뒤틀린 관계가 한 인간을 성공적으로 키워내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사회 전체가 어떤 영향력 아래 놓이는지 일종의 나비효과를 목도하게 된다.
먼저, 알란은 무책임한 아비의 전형으로서 등장한다. 그는 아들인 데이비의 양육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어쩌다 나타나 강아지 메이시를 선물하고는 다시 떠났다. 생계를 잇기 위해 엄마가 집을 비운 동안 혼자 방치되곤 하는 데이비에게 메이시는 아무런 조건 없는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애착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나 메이시 역시 돌봄이 필요한 하나의 생명이며, 그런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알란의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일화는 그가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랬던 그는 자신이 방치했던 아들 데이비가 게임 킬롤로지의 수법대로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복수를 결심하고 게임 개발자인 폴의 집에 잠입한다.
폴은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한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자 하는 통제광(control freak) 아비 밑에서 자라났다. 아이의 세계는 대체로 그 양육자를 통해 구성되며 양육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아이의 첫 번째 목표가 되곤 한다. 그러나 통제광의 가치 판단 기준은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즉 객관적인 지표가 아닌 주관적 가치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폴은 아비와 다른 사람이기에 그의 성취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과와는 상관없이 – 그가 아비보다 더 나은 성취를 이루는 것 또한 아비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기에 - 결코 아비에게 인정받을 수 없고 결국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시도했었던 노력들은 그만큼의 좌절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폴은 분노를 폭력의 형태로 바꾸어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자유를 온라인 세계에서 구현한다.
연극은 알란의 꿈, 어쩌면 환상, 또는 착란을 통해 데이비가 살아갈 수도 있었던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복수는 책임의 다른 이름이 아니며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일어난 사건을 바꿀 수는 없기에 그러한 신기루는 관객의 마음에 무거운 슬픔을 남기고는 허무하게 사그라들 뿐이다. 폴은 아이를 입양하여 아비가 되려 하나 그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자신에게서 제 아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결국 아이를 파양하고 만다.
‘킬롤로지’는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러나 이쯤에서 돌아보면 과연 객석에 앉아있는 우리 자신은 온전히 결백할까? 이 연극은 또한 흔히 사회에서 어떤 폭력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격한 미디어나 게임, 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곤 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본 리뷰는 기자가 관람한 회차 캐스트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