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리뷰] 우리의 목소리가 미래의 당신들에게 닿을 때까지, ‘프라이드’

2025-04-22     김희선 객원기자
2008년_함께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즐기는 올리버(권수현), 실비아(김수연), 필립(임주환) ㅣ 제공 연극열전

연극 ‘프라이드’가 다시 올라왔다. 2025년, 원작이 초연된 지 17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서 다시 한번 ‘프라이드’가 공연된다는 소식에 팔 할의 반가움과 그 나머지만큼의 우려를 안고 극장을 찾았다. 반가움의 이유야 두말할 필요가 없고, 우려의 이유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직도 “밖에 비 X나 오”는 시대에 머물러 있는 자신과 목도하게 될까봐.

2008년 영국 로열코트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연극 ‘프라이드’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인 건 2014년이다. 180분의 긴 러닝타임과 만 17세 이상 관람가라는 제한 속에서도 초연부터 뜨겁게 사랑받은 이 작품은 바로 다음해인 2015년 재연에 이어 2017년과 2019년까지 연달아 공연되며 관객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졌다.

1958년과 2008년을 오가며 펼쳐지는 ‘퀴어’와 ‘헤테로’의 삶의 교차, 그리고 맞물림. 다정하고 아름다운 표현들과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대사들. 50년이라는 시간을 쉴 틈 없이 오가며 서로에게서 뻗어나간 같지만 다른 인물들을 연기하는 매력적인 배우들과 그 안에서 온전히 다듬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 그리고 다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문득 뒤를 돌아보며 “방금 뭔가 느껴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든 한 줄기 ‘변화’를 느끼게 하는 특별한 공연. 그게 바로 ‘프라이드’가 지금껏 사랑받아온 이유들일 것이다.

1958년_올리버의 사진을 보는 필립(김경남) ㅣ 제공 연극열전

원작자 알렉시 캠벨은 ‘프라이드’를 잇는 두 시대(1958년과 2008년)의 설정이 지켜져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1958년은 필수적”이라고 못 박는다. 실제로 초연부터 3연까지는 현재를 공연이 올라온 연도(2014년, 2015년, 2017년)로 설정했으나 과거의 연도만큼은 바꾸지 않았다. 1958년은 작중 배경인 영국에서 동성애 혐오증이 만연했던 시기인 동시에,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인 내용을 담은 ‘울펜덴 보고서’가 발표된 지 1년 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변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캠벨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프라이드’를 보다 보면 유독 2008년의 필립과 올리버, 실비아에게 시선이 간다. 고정된 한 축의 연장선상에서 싸우고 고민하고 사랑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객석 한 구석에서 나홀로 극의 배경을 다시 이전처럼 2025년 현재로 바꿔본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꽤 많이 나아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는 사실을.

시간은 언제나 쏜살같이 빠르게 흐르고, 우리 주위를 둘러싼 많은 것들은 눈 깜짝할 새에 변해간다. 그러나 종종 ‘프라이드’와 같은 극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 변하고 있는 것은 시간 속을 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이며, 우리 주위의 것들은 생각보다 느리고 더디게 흘러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도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더 무심하고 잔인하며, 어떤 소수자들은 여전히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길바닥 위에서 자신을 내던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프라이드’는 삶을 변화로 이끌어주는 ‘목소리’가 되어 우리에게 닿아온다.

1958년_델포이 신전에서 들은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올리버(김바다) ㅣ 제공 연극열전

‘프라이드’를 보는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프라이드’가 너무 보고 싶은데, ‘프라이드’가 두 번 다시 올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이 아이러니컬한 감정은 연극 ‘프라이드’가 하나의 작품 그 자체로 갖는 가치를 넘어, LGBTQ로 대표되는 ‘소수자성’에 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프라이드’를 재확인하는 어떤 독특한 지표로 기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 테다. 이쯤에서 그 유명한 연극 ‘햄릿’의 대사를 변형한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2025년의 대한민국이라는 맥락 속에 ‘프라이드’를 넣어봤을 때, 과연 그 거울은 무엇을 비추게 될까.

이 극은 여전히 아름답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유의미한 변화를 대사와 연기에 실어 무대 위에서 객석으로 흘려보낸다. 이 모든 이야기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낡은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델포이 신전의 신탁처럼 객석에서 바람 하나를 더해본다.

1958년 필립의 목소리가 2008년의 올리버에게 닿았듯이, ‘프라이드’를 본 관객들의 목소리 역시 언젠가 더 먼 미래의 ‘프라이드’를 보거나 보지 못할 관객들에게도 닿을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 무대에 올라온 ‘프라이드’를 당신이 한 번쯤은 꼭, 보고 지나갈 수 있기를.

관극 포인트

▲ 1958년과 2008년을 장 단위로 오가며 변화하는 인물들의 감정선.

▲ 50년의 시간을 두고도 반복되는 어떤 언어들, 역사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세요.

▲ 극장 특성 상, 간혹 극과 관련 없는 소음이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습니다.

△ 연극 ‘프라이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스24 아트원 2관(~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