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우리 집 삼식님

수필가 김언홍

2016-08-03     서울자치신문

 

우리 집 삼식님

김언홍

 

 

 

 

전기 압력솥에 쌀 씻어 안치니 저 알아서 보글보글 끓는다.

세탁기안의 빨랫감도 스위치만 넣으면 저 알아서 돌아가고.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부엌문 뒤에 숨어서 눈 흘길 일이다.“내는 아이 낳고 일주일을 넘겨본 적이 없다. 일주일 만에 나와서 보리방아 안 찧었나.”

하던 노인이니 말해 무엇하랴.남편이 삼식이가 된  뒤로 아침저녁으로 사열식 하듯 돌아야 했던 개 먹이와 토끼먹이 그리고 이십여 마리의 닭 모이까지 알아서 주니 내가 마당 밟을 일이 없어졌다. “발 들어!” 하는 구령에 맞춰 두 발 날렵하게 소파 위로 올리면 청소도 척척 해준다. 때늦은 호사에 웃음이 실실 난다.

그러나 내게도 손과 발이 닳도록 가족에게 충성을 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백수 된 지 한 달쯤 지나던 날 남편이 자기 입으로 공표한 것이 ‘이제부터는 자기가 머슴노릇을 하겠다.’였다. 그것도 냉정한 얼굴로 웃음기 없이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비장한 얼굴로. 그러면서 자기를 고급머슴으로 대우해달라고 했다. 어떤 머슴이 고급머슴이냐고 물으니 돈 한 푼 안 주고 쓰는 머슴이 고급 머슴이란다. 그 대신 삼시 세끼는 꼭 차려 대령을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누가 머슴이고 누가 하녀인지 아리송한 요구였다.그런데 자칭 고급 머슴도 때로는 땡땡이를 쳤다. 하던 일 내동댕이치고 나무 밑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한다든지, 흘러간 노래 따위를 ‘쿵짝쿵짝 쿵짜작 쿵짝’ 귀청 떨어지게 틀어놓고 청승을 떤다든지.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식이라고 공언까지 하면서. 그럴 땐 손톱만큼도 주인마님의 눈치를 안 본다. 자칭 머슴이라는 사람이 주인마님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말릴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머슴이란 직함 외에 가장이라는 책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온 그가 떫은 감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젠 그만 쉬시지요!” 하는데 하늘이 노래지더라고. 그 말을 전하는 부사장 얼굴이 살생부를 펼쳐 든 저승사자처럼 보였다고.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쓸모없는 인생 됐으니 살아서 무슨 영화를 볼까나 하면서.“그동안 바삐 살았으니 이제부턴 쉬면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요. 어딘가에 당신이 할 일이 꼭 있을 거예요.” 그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자신의 비감한 마음을 아내가 다독거려 주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 뒤로 친구들과 부지런히 등산이다 낚시다, 산으로 강으로 누비고 다녔다. 꼭 일 년을 그런 식으로 살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슬며시 주저앉았다.

종로 삼가 파고다 공원 뒷골목 실버들의 아지트인 모처에서 친구를 만나고 온 뒤부터였다. 그날 돌아와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하던 이야기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내가 말이야, 종로 3가를 갔는데 말이야. 골목골목 노인들 천지더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거든, 그 노인들 바라보면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여기저기 쭈그리고 앉아 잡담 나누는 사람, 싸구려 이발소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뭔가 얻어걸리길 기대하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어슬렁거리는 사람, 파고다 뒷골목은 노인들로 넘치더라고 그들을 보면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눈에 이슬까지 촉촉해지며 거기 있던 노인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참 어이가 없네, 아니 거울도 안 보나 누가 누구 말을 하는 거야?“아이고 그런 소리 말아요, 다른 사람이 보면 거기 서 있는 당신도 똑같이 보여요.”

마누라 핀잔에 머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머쓱한 얼굴로 “하긴, 그건 그래.” 했다. 그리고는 뭔가 한참 골똘히 생각하더니 뒷말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글쎄 말이야, 그 많은 노인이 다 어디서 오느냐 하면 천안이나 평택 같은 데서 전철을 타고 온다는 거야. 경로는 공짜잖아, 그렇게 와 가지고 하루를 때우고 돌아가는 거래. 그런데 더 기가 막힐 일은 서울 노인들은 또 반대로 천안이나 온양 쪽으로 내려간다네, 거기 가서 점심으로 오천 원짜리 순댓국 먹고 이천 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시고 삼천 원짜리 온천욕 하면 딱 만 원이래, 그런데 그것도 살 만큼 사는 집 노인이지 그것도 못하는 노인들이 수두룩할 거야.” 머슴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졌다.

그 후 집에만 틀어박혀 두문불출 세상사 다 잊은 듯 지내더니 어느 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휘적휘적 뒷산으로 올라간다. 경망스런 생각이 들어 걸어가는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니 손에 끄나풀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심을 하고 있는데 얼마 후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누군가 잘라버린 소나무 둥치를 낑낑대며 끌고 내려온다. 그러더니 전기톱을 사달라고 조른다. 일이만 원도 아니고 이삼십만 원짜리 전기톱을 뭐하느냐고 하니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라고 생각하고 사달란다. 그 뒤로 온종일 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뚝딱거리고 앵앵거리고 난리다. 그러더니 또 한 열흘 잠잠하다. 나무를 송판처럼 켜서 말리는 중이란다.비닐하우스 안은 바깥보다 훨씬 덥다. 일부러 한증막에 땀 빼러 갈 필요 없을 만큼 뜨거워 난 오 분도 못 견디고 뛰쳐나오는데 그 안에서 몇 날 며칠 나무를 잘라 말리는가 싶더니 또 다시 뚝딱거리고 앵앵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한 사흘 그러는가 싶더니 나와서 좀 봐달란다.

아, 이 더운 날씨에 찜질할 일이 있나 더운 하우스 안엔 왜 들어오라는 거야? 마누라 머리 벗길 일이라도 있나! 짐짓 짜증을 내며 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멋진 나무 장식대 두 개가 떡 하니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나 원 참 우리 집 머슴이 이렇게 좋은 손재주가 있다니. 입이 헤벌어져 바라보는 내게 의기양양한 얼굴로 묻는다.“어때 멋있지 않아?”흥, 멋있다고 하면 또 의기양양해서 만날 이 노릇만 하고 있을 텐데 칭찬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래, 잘했다고 해야 기분이 좋겠지? 에라 모르겠다. 덩달아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너무 멋있어요. 내다 막 팔아도 몇십만 원 받겠네요.” 마누라 맞장구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정말?” 하고 묻는다. 마누라 칭찬에 입 벌어지는 남자는 첨 봤다. 저녁에 삼겹살 파티라도 열어야겠다. 머슴이 건강해야 우리 가족도 행복하니까.

 

 

 

 

▲ 양평문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전국 주부편지마을/수필사랑양평 회장 역임현 테마수필 부회장/수필사랑양평 동인수필집 『아직도 새벽운무는 그 자리에 있을까』『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공저 『거짓말』, 『첫사랑』, 『3도 화상』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