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시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반드시 그를 시인으로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주위 환경을 통해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생각해나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무는 거기에 그저 있을 뿐이다. 다만 사람은 그 나무를 보고 꽃, 열매, 잎사귀, 가지들을 분별하여 이것이 동물이 아닌 식물이며, 풀이 아닌 나무임을 인식하고 그것에 나무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한 이러한 일을 통해 사람은 자신이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며 나무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약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면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것이 먼저이다.
여기, 한 평범한 청년이 있다. 에르네스트 들라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평생 어떠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했다. 바람 구두를 신고 달리는, 언제나 잡히지 않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일은 그에게는 특별한 사람에게 선택받았다는 내밀한 희열과 언젠가는 자신도 ‘무언가’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가득한 일이었으나 동시에 안타까움으로 얼룩진 길이었을 것이다. 시종일관 친우인 랭보의 몸짓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는 타인인 랭보와 자신을 분리하여 구별해내지 못하고 그저 ‘랭보처럼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에 그가 그 상태로 남아 있는 한, 그의 바람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마지막으로 시를 쓴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자신을 시인으로서 인식할 수 없던, 그저 숨이 붙어 있는 채로 살고 있던 베를렌느에게 나타난 랭보는 그의 시가 훌륭함을 인정하며 다시 그를 시인으로서 실존하게 한다. 또한 샤를르빌 출신의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랭보를 동등한 시인이자 서로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의 향유자로서 인정한 베를렌느 역시 그를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추할 대로 추해진 이 세상의 앉은뱅이들을 뒤로 하고 자유로운 방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랭보가 시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실 세계와의 관계가 필요하다. 외부와 절연된 채로 베를렌느 – 랭보의 시를 이해하고 그를 시인으로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 - 와의 관계에만 의지한 채 시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자들이 하지 않는 경험을 하며 사람들이 보았다고 ‘믿었던’ 것을 진정으로 ‘보겠다’는 투시자로서의 삶은 자기 자신이 그만큼 특별한 존재임을 믿는 행위임과 동시에 타인을 그저 랭보 자신을 인정해줄 대상으로서만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시인으로서 인정받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점에서 랭보의 투시자-되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의미를 두던 단 한 사람이 더는 랭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고 그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무릎에 앉힌 시가 아름다움인 줄 알았으나 가만히 보니 사실은 쓴맛이었을 때 랭보의 절필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다면 랭보는 투시자-되기에 정말로 실패했는가? 이후 랭보가 아프리카에서 직업을 갖고 노동을 했다는 것은 이전의 파리와 런던, 브뤼셀 등을 오가며 기행을 벌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어딜 가든 세상은 지옥이라고 뇌까렸으나 아프리카로 대변되는 '삶' 속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던 그와 이전의 그는 같은 사람일 수 없고, 그렇기에 랭보가 길 위에 흩뿌려진 글자를 주워 담아 작성한 일기는 ‘진정한 시’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시적 운율을 따르거나 독창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랭보에게 시란 곧 삶이었고, 삶이 곧 시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곧 진정한 시이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살기 위해 죽도록 몸부림치며 찾아낸, 미지의 공간에 있는 진정한 시. 그리하여 그는 섭씨 50도를 훌쩍 넘는 지옥에서 마침내 보았을 것이다. 인간이 보았다고 믿었던 것을.
*본 리뷰는 기자가 관람한 회차 캐스트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