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 미 나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우디가 없으면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제이크의 대사처럼, 라우디는 연극 ‘킬 미 나우’의 그 모두를 지탱하는 서까래 같은 소년이다. 심지어 가끔은, 라우디가 무대 위 스터디 가족뿐 아니라 무대 밖의 관객들까지 보살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킬 미 나우’의 모두가 그렇지만, 공연이 끝나고 객석을 나와 거리를 걷는 그 순간에도 유난히 우리의 눈에 밟히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아마 라우디일 것이다. ‘킬 미 나우’ 4연에서 라우디 역을 맡아 열연 중인 허영손과 곽다인을 만나 ‘라우디’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심한 이유다.
서로가 말하는 서로의 ‘라우디’에 대하여
서울자치신문(이하 서자치) |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더블 캐스팅인 만큼 당연히 두 분의 라우디는 공통점이 있고, 그만큼 차이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분이 생각했을 때 서로의 라우디가 나와 참 닮았다, 나와 참 다르다 싶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영손 | 다인이의 라우디는 주변 상황을 기민하게 살피는 스타일 같아요. 저보다는 좀 더 섬세한 게 있죠. 누군가를 살피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고요. 저는 누군가를 살핀다기보다는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라우디? 그 정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다인 | 영손이 형의 라우디는 정말 듬직하고 자기 감정에 솔직해요. 힘든 일 많고 상처 많은 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정신 쏙 빠지게 하면서, 그래도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그런 존재 같아요. 조이한테도 너무 듬직한 친구이자 동시에 형의 이미지가 확실히 있어서, 이 모든 사건들이 지난 뒤에도 이 가족 안에 영손 라우디라는 친구가 있다면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흘러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심지가 굳고 단단한 친구가 아닌가 싶어요.
영손 | 저는 다인이 하는 걸 보고 ‘저런 거 너무 좋다’ 싶으면 쪼르르 가서 "야, 그거 너무 좋더라. 나도 그거 할래!" 해요(웃음). 극장 들어가기 전 마지막에 런 돌 때 (이)진희 누나랑 모니터를 하는데 다인이가 좋은 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나, 저도 저거 할래요" 하고 저작권이 있는 다인이에게 허락을 받아서 하고 있죠.
다인 | 저는 묻지도 않고 가져온 게 많아서, 형한테 빚을 지고 있는 게 많은데(웃음).
영손 | 그게 뭐냐면 트와일라와 마지막 공원 장면에서, 트와일라가 "우리 이러다 다른 사람 생기면 어떡하냐"고 할 때인데요. 다인이가 그 장면에서 ‘피식’하고 웃더라고요. 그 순간 뭔가 관계가 역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라우디가 트와일라를 귀여워하는 그 지점이 너무 좋았던 거죠. 늘 라우디가 앵기고(?) 매달리고 했는데 그 순간 서로 닿았다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그래서 쪼르르 달려가서 다인이에게 허락받고 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자치 | 라우디 이야기를 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트와일라잖아요.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며 흥미로웠던 지점이, 어떻게 보면 라우디와 트와일라 모두 알코올에 의한 피해자인데 두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에 술이 중요한 매개가 되더라고요.
다인 | 그런 아이러니가 장면적으로 매력적이기도 하고, 알코올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알아가는 그런 배움의 단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삶의 경험치가 다른 두 사람이지만 다음 스텝을 함께 밟아나가며 배워가는 인물들이니까요. 그리고 라우디가 술과 여자 이야기를 계속 하지만, 술 한 모금에도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그런 서투른 모습들이 그 장면에서 부각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내가 배워온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마음을 열어나가는 과정을 순수하게 보여주면 이 인물이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싶었죠.
영손 | 그 장면을 연습하면서 참 많은 단계를 밟아왔어요. 처음에는 만취로 해보기도 하고, 당연히 라우디가 술을 잘 마시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다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좀 더 매력적일 거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그쪽으로 갔는데, 와. 어렵더라고요. 술을 못 마시는 연기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거예요(웃음). 술잔 잡는 법도 그렇고, 여러모로 어설프게 하려고 많은 해프닝이 있었고요. 진희 누나와 (김)지혜 누나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다인 | 트와일라와 술을 마시고 첫 키스까지 이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한 번은 진희 누나가 "너만의 변칙적인 리듬을 찾아봐"라고 해서, 둘이 끝나고 남아서 계속해서 연습을 했어요. 라우디가 아닌 저의 플레이 리스트를 틀어 놓고 ‘비트(인물의 행동이 변화하는 지점)가 바뀔 때마다 노래를 바꿔가며 맡겨봐’라고. 그래서 그 긴 장면을, 계속 음악을 바꿔가면서 네다섯 번 넘게 반복 연습을 했던 적이 있어요. ‘이 음악을 꺼도 네 안에 계속 음악이 흐를 수 있도록 해 봐’라는 진희 누나의 말이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특훈이었죠, 거의(웃음).
영손 | 진희 누나나 지혜 누나가 그 장면에서는 사실 저희보다 훨씬 더 기민하고 섬세하신 분들이라, 저희가 이렇게 펼쳐 놓으면 얘기도 많이 해주시고 연습 시간 이외에도 우리끼리 장면을 계속 해보고, ‘이런 거 좋다, 저런 걸 해보자’ 이런 식으로 공연 직전까지도 디테일한 부분들을 재정립하면서 공연에 올라가게 된 거죠. 트와일라와 만나는 모든 순간의 드라마가 정말 많은 단계를 밟아 만들어졌어요.

서자치 | 조이 다음으로 휠체어를 운전하는 장면이 많다보니 이 부분도 연습하시면서 꽤 고충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영손 | 처음에는 조작 자체가 어설프니까 직진도 어려웠어요. 그런데 직진에 익숙해지고 나서 극장에 들어가니까 또 다른 숙제가 생긴 거예요. 연습실에서는 그냥 일자로 쭉 나와서 대사만 했는데, 극장을 가니까 코너링으로 이만큼을 더 나와야 했거든요. 계속 덜컹거리면서 대사를 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게 정말 너무 없어 보이는 거 있죠(웃음). 그래서 전 이제 아예 팔꿈치를 딱 붙여서 기대서 타고요, 출발하기 전에 앞바퀴를 직진하기 편하게 돌려놔요. 어휴, 그 운전이 제일 긴장돼요.
다인 | 첫 등장이고 분위기를 깨부숴야 하는데.
영손 | (최)석진이 형이랑 첫 공연 때 형은 휠체어에 기대어 있고 트와일라 보느라 몸을 기울이고 하느라 휠체어가 기울어서 뒤로 넘어갈 뻔한 아찔했던 순간도 있고요, 또 한 번은 출발을 먼저 해서 제가 다급히 쫓아간 적도 있고(웃음).
다인 | 저도 그것 때문에 약간 강박이 있어서요(웃음). 제가 무대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이 절대 아닌데, 음악이 들리면 ‘나가야 해’라는 생각 때문에 조이들을 못 기다려주고 바로 출발하기도 하고. 그 여유를 찾는데 좀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영손 | 어쨌든 저희가 휠체어를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꾸기도 하고, 능숙하게 조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조이와 관계를 더 친밀해 보이게 하는 것 같아요.
서자치 | 두 라우디의 미묘한 차이점이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가 제이크가 안락사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장면 같아요. 그때 영손 라우디는 가족들과 로빈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다인 라우디는 조이 쪽을 계속 바라보는데요. 그때 라우디들의 마음이 궁금합니다.
다인 | 이 부분은 영손이 형이랑 맞춘 게 없어서 약간 각자 플레이가 된 것 같아요(웃음). 제 라우디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 10초 내로 조이와 나눴던 얘기를 떠올렸을 것 같아요. 조이가 이 얘기를 라우디에게 안하진 않았을 것 같고… 그 순간 조이가 말했던 ‘아저씨를 보내줘야 될 때’가 다가오고 있구나, 어렴풋이 그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조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사실 저는 그 순간뿐 아니라 19장 마지막 신에서 조이를 많이 보는 편이거든요. 이 안에서 모두가 제이크에게 집중할 때, 조이를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버지가 이렇게 무너지는 걸 직접 눈앞에서 보는 아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으니까.
영손 | 저는 보이는 그대로, 사태를 파악 중이에요. 그 안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저만 모르니까요. 그래서 씻겨달라고 할 때 ‘왜?’라는 물음표가 엄청 셌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런 걸 몰라야 아저씨를 업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 사실을 알아버린 다음에 내가 어떻게 아저씨를 업고 나갈 수 있지, 그게 저는 성립이 안 돼요.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의 어리둥절함과 나가면서 ‘설마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겠지’하는 그 마음의 간극을 그 장면에서 좀 크게 두고 싶었어요. 아, 이거 너무 스포 아닌가요(웃음).

두 사람이 말하는 ‘킬 미 나우’
영손 | 어떤 극이라고 말을 잘 못하겠어요. ‘킬 미 나우’는 ‘킬 미 나우’입니다. 그리고 제게는…좋은 배우가 되고 싶어서 선택한 작품이자,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작품인 것 같아요. 이 공연을 하면서도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를 갖게 하는 극이에요. 알면 알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들도 있더라고요. 여러모로 고민거리들을 연장시켜주는 작품이라서 좋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킬 미 나우’가 가진 힘이 아닐까 싶어요. 고민하고, 더 알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죠.
다인 | 현대인이라면 이 5명의 인물 중 마음이 착 달라붙는 캐릭터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 인물로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이냐에 대한 얘기라 누구든 공감할 수 있고 따라올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요. 저 역시 계속해서 질문이 많아지고, 어려운 지점도 더 많아지는 작품인데 무대 밖의 삶을 살아갈 때 ‘어떻게 하면 같이 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 같아요. 배우로서는 하나의 공연이 만들어지는데 있어 좋은 텍스트와 끈끈한 팀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확신하는 시간이었고요.
앞으로의 계획과 각오
영손 | 저의 욕망은 오랫동안 같았던 것 같아요. 어떤 ‘연기’를 하고 싶다기보다 그냥 거기 ‘존재’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배우에게 가장 큰 칭찬은 ‘연기 정말 잘하더라’가 아니라 ‘너 진짜 그 사람 같더라’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고, 이제 ‘보이즈 인 더 밴드’와 ‘나의 아저씨’라는 작품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나의 아저씨’는 16부작 드라마 원작인 작품이고,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 감동을 전달하는데 어떤 방식이 좋을까 계속 고민하며 나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보이즈 인 더 밴드’는 저희가 존경하는 (오) 정택 형님이 ‘재연을 하면 방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지 말고 더 나아가 보자’라고 말씀해주셔서 그런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인 | 올해로 데뷔 5년차인데,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아지는 기로에 서 있죠. 스스로를 재정립하는 시간이라 어떤 배우가 되고 싶다, 어떤 연기를 하고 싶다는 답을 문장으로 내놓기는 어렵지만 배우로서도 퍼포머로서도 공격적으로 어딘가에 계속 자신을 던지고 싶어요. 저를 던져 내놓고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들 속에서 제가 또 다음 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차기작인 ‘보이즈 인 더 밴드’도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초연 때 건드리지 못했던 그 밑의 레이어를 한 겹씩 더 열심히 찾아가고 있습니다. 초연의 답습에 그치지 않는 좋은 재연이 될 거라는 확신이 좀 들어요.
보너스_허영손과 곽다인이 생각하는 ‘킬 미 나우’ 멤버들의 음식 이미지
이석준은 장어덮밥이다. 허영손은 ‘민물장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배수빈은 시원한 음식의 이미지라며 밀면을 이야기하더니, 이내 비빔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어디쯤으로 갔다. 국물이 자박하게 있는 물막국수 같단다.
김지혜는 허영손과 같은 국밥과다. 든든함이 포인트다. 반면 이진희는 젤리다. 이유는 단순하다. “누나가 젤리를 너무 많이 먹어서 젤리밖에 생각이 안 나(곽다인)”.
전익령과 이지현, 두 로빈은 대체로 한식의 느낌이 있다. 전익령은 정석적인 ‘집밥’, 이지현은 ‘순두부찌개’다.
조이들은 모두 음료수다. 최석진의 경우 곽다인은 닥터페퍼를, 허영손은 맥콜을 주장했다. 김시유는 식혜, 이석준은 상큼한 과일주스라고. 이유를 묻지는 말아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그냥 ‘느낌’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