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원 때문에…

사라 최화경

 

 

불과 두어 달 전에 칠백 원이 없어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골든 리트리버 종인 샌디와 북악 스카이웨이로 산책을 나갔다가 무심코 아무 준비 없이 팔각정까지 강행군을 하게 된 날 말이다. 나는 유난히 화장실을 자주 가기 때문에 평소에 물을 많이 먹지 않는다. 오래 살려면 물을 많이 마시라고 온갖 매체에서 떠들어 대지만 나 때문에 친구들까지 성가시게 했던 화장실 출입을 줄이기 위해 대학생 때부터 굳어진 습관이다. 단체 여행을 갈 때마다 나눠주는 공짜 생수는 그래서 가방 속에서 무겁게 뒹굴다 버려지기 일쑤다. 그날도 별 생각 없이 근처에 있다는 팔각정이나 모처럼 가보자는 생각에 계속 걸었는데 가도 가도 팔각정은 나타나질 않았다. 샌디와 나는 이미 녹초가 되었다. 등산로의 중간 정상처럼 보이는 곳에 겨우 다다랐을 뿐인데... 그래도 오기가 나서 끝까지 가기로 했다. 공중 화장실에 가서 샌디에게 물이라도 먹여야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드디어 다다른 팔각정은 온갖 행락객들로 넘쳤다. 화장실에서 샌디에게 물을 먹인 후 나도 모르게 타는 듯한 갈증 때문에 크로스로 매고 있던 백을 뒤지기 시작했다. 생전 목이 말라 물을 사 먹어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이례적인 갈증이었다. 항상 돈 만 원 정도는 들어있었는데, 그날은 샌디 용변수거용 비닐 봉투 몇 장과 휴지, 물티슈 그리고 달랑 300원만이 뎅그러니 들어 있었다. 샌디 때문에 편의점 안을 문 밖에서 들여다보니 생수 한 병 값은 천 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젊은 연인들과 등산복 차림의 중년들. 그리고 가족 단위의 슬리퍼 차림의 나들이 족들을 보자니 누구에게도 선뜻 도움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오륙년 전, 교회 카페에서 어느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 중학생이 할머니 생신이라며 오만 원을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앞으론 미리미리 용돈을 모아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망설이다 만 원을 줬던 기억이 났다. 주변에선 요즘 멀쩡하게 차려입고 돈 달라는 애들이 많다며 다시는 주지 말라고 했다. 강남 골목길을 운전하고 가는데 깨끗하게 차려입은 아저씨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지방에 돌아갈 차비 좀 도와 달라며 차창 문에 매달리는 통에 만 원을 줬던 생각도 났다. 남이 어렵다고 할 때 나는 비교적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편이었는데 정작 내가 도움을 청할 곳은 없다니...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지나친 적도 많았다. 지하철 걸인들은 무조건 외면하지 않았던가. 이래서 평소에 선한 일을 해왔어야 하는 건데... 남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팔각정 그늘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 갈증을 다스렸다. 시야에 깔끔한 중년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좌우를 보니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얼른 샌디를 끌고 그 앞으로 가서 머뭇머뭇 모기만한 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목이 말라서 그러는데 칠백 원만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삼백 원 밖에 없어서요.

갚기도 뭐 한 칠백 원을 계좌로 보내겠다는 말도 전화번호를 따려는 수작으로 보일까 봐 아예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이백 원 밖에 없네요라며 거절했다. 칠백 원도 얻을 곳 없는 인생을 살았다니... 예상치도 못한 퇴짜에 그동안 남성들의 선심을 무조건 수작으로만 간주해 왔던 오만함에 대한 반성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빈 알미늄 캔처럼 구겨져버린 자존심을 얼른 크로스백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재빨리 독일 속담(einmal ist keinmal)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이 말을 읊조리며 무너진 자존심의 깃을 바싹 잡아 세웠다. 겸연쩍게 웃으며 애꿎은 샌디 목줄만 바짝 잡아끌었다. 그의 눈길을 피해 먼 곳만 응시하는데 그가 가방을 부스럭 거리더니 자신이 직접 입에 대고 마셨던 듯한 반쯤 남은 보리차 병을 흔들며 꺼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타인의 침이 섞여있는 물을 마실 비위는 못되었다.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가리다니 결국 수작을 걸었던 것이로군... 하며 나를 꽃뱀 취급이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제발 이거라도 마시겠냐는 말일랑은 하지 않기를 빌며 못 본 척 샌디를 쓰다듬으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어디서 사이클 복을 입은 멋진 처녀가 샌디에게 달려오더니 한바탕 예쁘다고 수선을 떨다 갔고 나는 마른침만 삼키다 그곳을 떠날 채비를 했다. 사이클 복 처녀가 가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는 보냉 물병의 냉수를 컵에 따랐다. 그리고선 인스턴트 커피 알을 조금 섞더니 내게 권했다. 침이 섞인 보리차가 아닌지라 염치 불고하고 덥석 그 컵을 고맙다며 받았다. 감로수처럼 목을 축인 후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정말 목이 말랐었다는 것을 제발 믿어달라는 듯 몇 번이나 비굴하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땡볕의 팔각정을 빠져나왔다.

그 뒤론 습관처럼 동전이 생길 때마다 산책용 크로스백 앞주머니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그동안 모아진 많은 동전으로 제법 묵직한 크로스백에서 동전을 쏟아내고 대신 지폐 몇 장을 챙겼다. 등산 가방에 샌디 물병과 내가 마실 얼음물까지 완벽하게 챙겨 넣은 후 다른 날보다 일찍이 아파트를 나섰다. 샌디 운동을 그날 이후로 너무 등한시했기에 장거리 행군으로 밀린 운동을 하자 싶었다. 지난번과 같은 시간대에 가서 괜히 석연치 않게 의심받았던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그저 샌디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나선 것이니까.

 

북악스카이웨이의 초입인 '곰의 집'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내게 인사를 한다. 골프채를 든 남자였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는 지난 번 팔각정에서 칠백 원에 인색했던 사람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샌디를 보고서 알아봤습니다. 평소의 저답지 않게 천 원을 드렸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동전 칠백 원만 생각하고 쩨쩨하게 굴었는지 계속 제 자신을 많이 탓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인사를 마치고 팔각정을 향해 가는데 물을 잔뜩 싣고 온 가방이 벌써부터 무겁게 느껴졌다. 오해도 다 풀렸는데 이 더운 날 굳이 팔각정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집으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샌디가 다리를 버티며 저항한다. 나 운동시키려고 나선 것 아니었나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평소 운동량은 채웠어, 임마!

 

 

사라 최화경

수필가

서울출생

2011년 <한국산문>으로 등단

교육학 석사

전 성신여대 사감

현 한국산문 편집위원

제8화 한국산문 문학상 수상

sarahchay@naver.com

 

저작권자 © 서울자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