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19세기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는 그야말로 소설보다 훨씬 더 소설 같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발자크 평전』에 따르면 적어도 발자크의 일생은 여자, 귀족, 빚더미, 그리고 소설과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 있다.

우선 발자크의 여성편력은 어머니 안 샤를로트 살랑비에(1778~1854)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32살이나 연상인 베르나르 프랑수아와 결혼하였으나 네 명의 자녀를 낳았고 결혼생활도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좀 까다로울 정도로 히스테릭한 여자였다. 그녀는 21살에 오노레를 낳자마자 산후조리 도중 갓난아기를 내쫓듯 집밖의 유모에게 맡겨버린다. 오노레는 일주일에 단 한번 일요일에 먼 친척 찾아가듯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7살이 되었을 때 오노레는 방돔 기숙학교에 보내진다. 살앙비에는 그가 어머니에게 다가갈 길을 냉정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그는 7년 동안 다시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발자크의 소설 『루이 랑베르』는 그의 고통받는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약하고도 아주 강한 이 소년은 자신의 책상을 앞에 놓고 의자에 묶인 노예처럼 역겨움의 나사 속으로 조여 넣어져서 자신의 겉껍질을 학교의 수많은 폭군들에게 내맡겨야 했다.” 이렇듯 모성애 결핍이라는 내적 상처에 시달린 발자크는 훗날 “나는 한번도 어머니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내 삶에서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발자크에게 22살 무렵 첫사랑 드 베르니(de Berny) 부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당시 나이가 45살이나 된, 그래서 아이를 아홉이나 낳은, 결혼한 딸 덕분에 이미 할머니가 된, 그런 여인이었다. 발자크는 우연히 옆집에 살던 드 베르니 부인의 두 아들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머니 연배의 드 베르니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찾은 것이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밝고 선량한 눈길로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격정, 서투름, 어찌할 바 모름 등을 부드러운 태도로 고쳐주었다. 그 부드러운 가르침을 통해서 발자크는 난생 처음 인생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에 1822년부터 1833년까지 발자크의 가슴 속에 잠자던 남자가 깊은 잠을 깨고, 삼류작가로 잠자던 시인도 천천히 깨어난다.

그의 여성편력에는 귀족 의식도 한 몫을 한다. 발자크의 할아버지는 농부였고, 그의 아버지도 부르주아 시민계급으로 신분 상승을 했지만 귀족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상이나 친척 중에 누군가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는 어떤 기록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姓) 앞에 드(de)를 추가함으로써 귀족으로 자처하고 사교계에서도 그렇게 행세한다. 즉, 세상에 오노레 발자크가 아니라 “오노레 드 발자크” 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에게 바친 (자신의 진면목이나 진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 『잃어버린 환상』의 헌사에서도 “드 발자크”라고 서명했고, 그가 사랑했던 대부분의 여자들도 돈 많은 귀족의 삼사십대 부인들이었다.

그가 그런 부인들과 교제한 데는 돈과의 악연 탓도 없지 않다. 발자크는 대학에서 법을 공부한 뒤 공증인 파세 사무실에서 일한다. 하지만 20살에 그는 작가로 성공하여 부자가 되겠다며 직장을 뛰쳐나온다. 그의 부모는 마지못해 2년만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파리에 셋방을 얻어준다. 발자크는 네 달 만에 희곡 『크롬웰』을 쓰지만 실패한다. 삶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글쓰기 수련도 하지 않은 애송이가 2년만에 걸작을 쓴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익명으로 영혼 없는 글을 쓰는, 그래서 매춘을 하듯 매문(賣文)으로 생계비를 버는, 글쓰기의 막노동꾼이 된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작업실에 나폴레옹 석고상 하나를 비치한다. 그 받침대에는 발자크의 남다른 각오가 늘 붙어 있었다. “그가 칼로 시작한 일을 나는 펜으로 완성하리라.”

아무튼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자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25살에 고전 출간 사업을 벌이지만 실패한다. 그 실패를 만회하려고 빚으로 인쇄소를 사들이고, 출판업도 하지만 또 실패한다. 나중에도 왕당파 신문사를 사들여 운영하고, 광산 사업도 벌이지만 모조리 실패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돈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발자크는 더 많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게다가, 그는 속물적 낭비벽도 심했고, 구제불능의 투기꾼이기도 했다. 그는 장차 집필할 소설의 원고료까지 선불로 당겨쓰며 사교계에 드나들었고, 호사스런 해외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는 더욱 빚 독촉에 시달린다.

이러한 질곡 속에서도 30살에 발자크는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감을 자각하고, 자기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결혼 생리학』은 온 세상 여자들에게 서른살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나이를 선포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특히, 『나귀 가죽』을 출간할 때 발자크는 벌써 소설 총서(叢書) 『인간 희극』(1842~1848)에 대한 의미심장한 구상도 갖게 된다. 즉, 여러 소설에 재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사회의 횡단면을 포괄적으로 그려낸다는 비전이다. 이에 그는 쓰고 또 썼다. 그의 상상력은 한번 불이 붙으면 거대한 산불처럼 한없이 타올랐다. 매일 자정에 기상하여 수도복 차림으로 14시간, 16시간씩 쉬지 않고 계속 썼다. 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열두어 개의 까마귀 깃털 펜이 닳도록 썼다. 짧은 휴식에 커피를 마셨고, 그렇게 마신 커피가 5만 잔이나 되는, 그 강한 커피는 100만 줄의 글을 쓰게 했지만 그의 심장을 너무 일찍 파괴하고 만다.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은 단테의 『신의 희극(La Divina Commedia), 즉 신곡』에 상응하는 제목이다. 이 제목을 『신곡(神曲)』처럼 번역하면 『인곡(人曲)』이 될 수 있다. 발자크는 신(神)의 희극에 대하여 지상의 희극, 신의 세상 구조물에 대하여 인간 사회의 구조물을 상상한다. 16쪽으로 된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예술가는 인간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우연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 자체가 원래의 역사 서술자이며, 나는 단지 그 서기일 뿐이다.”고 밝힌다. 또한, 『인간 희극』의 준비 목록(1845)은 사생활의 장면들, 시골 생활의 장면들, 파리 생활의 장면들, 정치 생활의 장면들, 군인 생활의 장면들, 전원 생활의 장면들 등의 주제별로 이미 쓰인 소설들과 아직 쓰이지 않는 소설들에 대해서, 그리고 수천 명의 등장 인물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엄청난 계획은 그의 때이른 죽음으로 토르소(torso)의 형태로만 남았다. 그럼에도 장편소설 74편을 포함하여 총 97편으로 이루어진 『인간 희극』에는 2천여 인물들이 등장하며, 460명은 여러 작품에 반복 등장한다. 요컨대 이 작품들은 복잡한 층위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사회소설이다. 이에 발자크는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서 자기 시대의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인물을 탁월하게 그려낸 문학적 초상화가로 평가된다.

실제로 발자크와 교제했던 여자들은 대부분 그의 이러한 문학적 명성에 취했던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 살던 에바 폰 한스카 부인도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자기보다 25살이나 위인 남편과 12년 결혼 생활에 (딸 하나만 살아남았지만) 자녀를 5명이나 낳았다. 그러한 그녀가 1832년 ‘모르는 신들’이라는 인장을 찍고 ‘모르는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편지를 발자크에게 보낸다. 한스카 부인은 자신의 백작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백만금의 귀족 여인을 통해 빚더미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귀족병까지 앓던, 상상력의 천재 발자크가 그 귀족 냄새를 맡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에 그 편지 한 통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1850년 3월 14일 베르디체프에 있는 성 바르바라 교회에서 비밀리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때 이미 발자크는 병이 깊었고, 1850년 8월 18일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빅토르 위고는 발자크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바친다. “그의 생애는 짧았으나 충만했습니다. 날짜보다는 작품이 더욱 풍부한 생애였지요. 아, 이 강력하고 절대로 지치지 않는 노동자, 이 철학자, 이 시인, 이 천재는 우리들 사이에서 위대한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대로 태풍과 투쟁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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