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프랑스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의 3부작 소설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을 읽다 보면 몇 가지 흥미로움으로 뭔가 결이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그리하여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대목들이 있다.

우선 이 소설은 발자크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발자크의 평전』을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그런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이를테면 프랑스 남부 소도시 암굴렘의 두 “시인” 다비드(David)와 뤼시앙(Lucien)의 삶이 그렇다. 젊은 인쇄업자 다비드의 삶은 인쇄소와 신문사를 운영했던 발자크의 삶과 겹친다. 특히, 다비드의 처남인 청년시인 뤼시앙은 발자크의 분신이 아닐까 한다. 발자크가 20대에 어머니 연배의 드 베르니 부인에게 깊이 빠졌던 것처럼 뤼시앙도 연상의 유부녀 바르즈통 부인과 사랑의 도피를 한다. 이 꽃미남 시인은 발자크의 일면을 반영하지만 그는 분명 발자크의 빼어난 통찰력이 창조한 인물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이 이야기가 과연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이지 하는 느낌이다. 제1부 『두 시인』은 1837년에, 제2부 『파리에 온 지방의 위인』은 1839년에, 그리고 제3부 『발명가의 고통』은 1843년에 각각 발표되지만, 이 소설의 주요 사건들은 모두 1820년 전후 18개월에 걸쳐 앙굴렘과 파리에서 벌어진다. 즉, 제1부는 암굴렘에서, 제2부는 파리에서, 그리고 제3부는 다시 암굴렘에서 전개되며, 각각 독립적인 구성과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잃어버린 환상』은 지금부터 20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조망이며, 그러한 조망 속에서 우리는 갖가지 인간상을 접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들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로 재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배우 코랄리의 성공과 실패는 배우 자신의 연기력이나 재능보다는 돈으로 매수한 박수부대와 무관하지 않고, 신문의 평가기사 같은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오늘날에도 한 가수의 성패는 종종 방송국 피디(PD)의 선택, 열성 팬들의 확보, 그 가수의 비주얼 등이 좌우한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 지구촌 어디서나 일어날 것 같다. 왜냐면 바로 인간의 본성 또는 사회의 속성이 그러한 일들의 재연을 보증할 테니까.

세 번째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점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발자크의 타고난 상상력과 필력이다. 『잃어버린 환상』에는 소설의 스토리와는 다소 동떨어진 듯한 종이의 유래와 역사, 인쇄술의 변화 과정, 문학의 상품화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들어있다. 이러한 상세한 묘사는 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소설 읽기의 흥미를 저해할 수 있다. 게다가 760쪽이 넘는 소설의 길이도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해 요소들은 발자크의 필력과 천재적 상상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왜냐면 그런 정보들은 소설의 배경 지식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촘촘하게 짜여진 사건들의 인과관계, 즉 반전을 거듭하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묻히기 때문이다.

파리에 온 지방의 “위인” 뤼시앙은 바르즈통 부인에게 버림받은 뒤 힘든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도서관에서 젊은 작가 다르테즈(d'Arthez)를 만난다. 다르테즈는 철학, 예술, 정치, 과학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엘리트 청년들의 비밀결사체 세나클(Cénacle)의 우두머리이며,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신비스런 천재”이다. 그는 뤼시앙의 용기를 북돋으며 그의 소설과 시에 대한 진지한 조언과 첨삭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복장이나 가구 등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다르테즈의 소설론은 바로 발자크의 소설관이다. 또한, 다르테즈는 뤼시앙의 누이 에브(Eve)의 편지 질문에 진실 그대로의 답변도 보낸다. “뤼시앙은 시적인 사람이지만 시인은 아닙니다. 그는 꿈을 꾸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동요되기는 하지만 창조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뤼시앙이 허영심과 사치의 유혹에 무너지는 쾌락주의자 또는 돈의 노예라면 다르테즈는 어떤 외적 조건에도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 위에 독자적으로 우뚝 선 이상적인 인물이며 발자크의 또 다른 분신이다.

네 번째로 우리를 압도하는 것은 이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누가 누구인지 도저히 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에 발자크의 작중인물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발자크 작중인물 사전』까지 출판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인물들은 한 작품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재등장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확대해간다. 또한, 이러한 인물들의 대화 속에는 19세기초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문인들이 언급되고, 이들의 사상이나 작품들도 논의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사상적 쟁점이나 사회적 격변의 명암을 엿보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대혁명(1789), 나폴레옹 제1제정(1804), 왕정복고(1814), 7월혁명과 시민왕 루이 필립의 등장(1830), 노동자들의 6월혁명 실패(1832), 뒤 이은 2월혁명의 성공(1848) 등 지독한 사회적 몸살을 앓고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도 본격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기는 천태만상의 인물들을 양산한다. 이를테면 뤼시앙을 저널리즘의 세계로 끌어들인 루스토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신문이나 광고의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혜안도 지녔지만 당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정치 상황에 편승하며 이해득실에 따라 필봉을 휘두르는, 언론계의 살쾡이 같은 그런 인물들이다. 그들의 기사는 작품이나 연기의 진가와 상관없이 진영 논리에 매몰되거나 흥행몰이와 영합하고, 그 이면에는 돈이나 권력에 대한 “환상”이 꿈틀거린다.

마지막으로 감탄하게 하는 점은 발자크의 소설 총서(叢書) 『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의 함의와 관련이 있다. 『잃어버린 환상』은 총 97편에 달하는 이 소설 총서의 중심 축이고, 『발명가의 고통』은 이 소설의 마지막 편에 해당한다. 인쇄업자 다비드는 『인간 희극』의 2천여 작중인물들 중 하나지만 그는 “발명가”의 고통을 짊어진 소시민이다. 그는 구두쇠 아버지 세샤르의 인쇄소를 비싼 값에 떠맡아야 했고, 새로운 인쇄기와 거대 자본으로 개업한, 기업 사냥꾼과도 같은, 쿠엥테 형제의 인쇄소에 대응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비드는 새로운 제지법(製紙法) 개발에 몰두하지만 그의 직원 세리제가 쿠엥테 형제에게 매수된다. 아내 에브가 헌신적인 내조를 하지만 처남 뤼시앙는 다비드의 명의로 3천 프랑의 위조 어음을 발행한다. 이 어음은 만 2천 프랑의 빚으로 불어나고, 처남을 범죄자로 만들 수 없는 다비드는 에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빚의 변제 책임을 떠안는다. 그는 빚의 변제 기한을 연장하려고 동창 프티 클로에게 소송을 맡기지만 그 친구는 쿠엥테 형제와 결탁한다. 뤼시앙이 매제를 돕고자 벌인 일은 오히려 다비드의 체포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다비드는 결국 투옥되고, 쿠엥테 형제가 발명 특허의 실익을 앗아간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발자크의 『인간 희극』은 우리 인간사회의 횡단면을 입체적으로 적나라하게 반영한, 우리들 모두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뤼시앙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극단적 결심을 한다. 하지만 죽음의 길로 가는 도중 그는 에레라 사제로 변장한, 발자크의 작중인물 중 가장 교활한 보트랭(Vautrin)을 만나게 되는데… 그 스페인 사제로부터 야심의 법전에 관한 궤변을 들은 뤼시앙은 자신의 결심을 바꾸고 에브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나의 사랑하는 에브, 여기 만 5천 프랑이 있다. 나는 자살하는 대신에 내 생명을 팔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며, 어느 스페인 외교관의 비서 이상의 것, 즉 나는 그의 피조물이다. 나는 무서운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아마도 물에 빠져 죽는 것보다는 더 낫겠지… 불쌍한 오빠, 뤼시앙”

한마디로 잃어버린 “환상”의 막은 내렸지만 인간들의 “희극”은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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