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살아가는 동안 먹고 사는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비야사(Vyasa)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고전 『바가바드 기타』는 이러한 선택의 문제를 우리네 삶의 핵심 주제로 다룬다. 즉, 전쟁터에서 적이 된 사촌 형제들에게 활을 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하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난감한 내적 갈등의 문제를 다룬다. 이 고전은 그러한 내적 갈등에 수반되는 철학적 쟁점들을 천착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 즉 해탈의 함의를 제시하고자 한다.

흔히 『바가바드 기타(Bhagavad-gῑtā; 존귀한 자의 노래)』는 힌두교의 3대 경전 중의 하나로 꼽히지만 원래 인도 고대신화의 한 축을 담아내는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ābhārata)』의 제6권 『비슈마(Bhishma)』의 일부이다. 이 18권짜리 『마하바라타』는 약 10만 쉴로카(shloka; 2행 연구)에 달하지만 『기타』는 700쉴로카에 지나지 않는다. 『마하바라타』는 글자 그대로 “위대한(mahā) 바라트(Bhārat)족의 이야기”이다. 즉, 바라트족의 후예인 인도인들의 다르마(dharma; 法)와 역사(itihasa; 일어난 일들)의 집대성이다. 이 대서사시는 『기타』가 힌두교 경전으로 편입되기 전부터 신화로 전승되어 온 쿠루(Kuru)족의 왕위 쟁탈전을 다루며, 그 기본 줄거리는 『기타』의 핵심 주제와 엮여 있는데…

하스티나푸라에 자리 잡은 쿠루족의 비치트라비리야 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왕권은 장남 드리타라스트라(Dhritarastra)에게 계승되야 하지만 그는 장님이어서 적법한 왕이 될 수 없었다. 이에 동생 판두(Pandu)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판두도 또한 저주를 받았다. 그는 임시로 드리타라스트라에게 왕좌를 넘기고 두 아내와 함께 히말라야에 은거한다. 판두가 죽은 뒤 유디스티라, 비마, 아르주나, 나쿨라와 사하데바 등 그의 다섯 아들들, 즉 판다바(Pandava)들은 하스티나푸라로 오게 된다. 그들은 사촌 형제들인 드리트라스트라의 아들 100명, 즉 카우라바(Kaurava)들과 함께 생활하며 크샤트리야로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판두의 장남 유디스티라(Yudhisthira)는 성년이 되자 쿠루족의 정식 후계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드리타라스트라의 장남 두료다나(Duryodhana)는 유디스티라를 쿠루족의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적개심을 품고 판다바들을 해칠 갖가지 음모를 꾸민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드리타라스트라는 왕좌에서 물러나면서 카우라바들과 판다바들에게 왕국을 양분해준다. 이에 두료다나가 하스티나푸라에서 왕위를 계승할 때 유디스티라도 인드라프라스타에서 왕이 된다. 하지만 두료다나는 이런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유디스티라를 협잡 주사위 놀이에 끌어들이고 도박으로 그의 왕국을 빼앗는다. 그는 판다바들을 추방하면서 12년 동안 숲 속에 은거한 뒤 마지막 1년을 성 안에서 들키지 않고 지내면 13년 후에 왕국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두료다나는 유배 기간이 끝났는데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이에 판다바들은 자기네 왕국을 되찾기 위해 카우라바들과 전쟁을 벌인다.

이러한 『마하바라타』의 이야기 속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우선 이 대서사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낳은 특급 보물창고라는 점이다. 우리네 상상의 산물은 필연적으로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신화는 인간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판두의 첫째 부인 쿤티(Kunti)의 삶이 그렇다. 그녀는 판두 왕과 결혼하기 전에 태양신 수리야와 사이에 카르나를 낳았지만 그 갓난아기를 강물에 띄워 보낸 뒤 이를 숨긴다. 쿤티는 결혼한 후에도 운명의 덫을 피하지 못한다. 판두가 사냥을 나가서 짝짓기 하는 사슴을 쏘았는데… 성인(聖人)의 화신이었던 그 사슴은 죽어가면서 “판두도 누군가와 관계를 하면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남긴다. 쿤티는 판두와 자지 못하니 아이를 낳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법(法)의 신 다르마(Dharma)를 맞아들여 유디스티라를 낳았고, 바람의 신 바유(Vayu)를 맞아들여 비마를 낳았고, 신들의 왕 인드라(Indra)를 맞아들여 아르주나를 낳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네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쿤티의 아들들은 삶의 서로 다른 성향과 가치를 대변한다.

또한, 『마하바라타』에는 고대 모계사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판두의 다섯 아들들은 드라우파디(Draupadi)의 공동 남편들이다. 판다바들은 목숨을 보전하고자 이곳저곳 떠돌다가 판찰라(Panchala)족의 왕궁에서 열린 남편 선발대회에 참가하고, 최후 승자가 된 셋째 아르주나(Arjuna)는 드라우파디를 아내로 얻는다. 다섯 형제들은 기쁜 마음으로 드라우파디를 데리고 쿤티의 집 앞에 와서 큰 소리로 외친다. “어머니, 우리는 굉장한 보배를 얻어왔어요.” “얘들아, 부디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 쿤티가 이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 그 보물이란 게 한 처녀가 아닌가! 쿤티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머니의 말은 아들들에게 거룩한 것이니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드라우파디는 다섯 형제들의 공동 아내가 된다. 이는 분명히 고대 모계사회의 흔적이며 인류의 삶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쿤티는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또 다른 핵심 인물 크리슈나(Krishna)와도 긴밀한 가족관계로 엮여 있다. 크리슈나는 바수데바(Vasudeva)(참고로 deva는 ‘신’이란 뜻)의 아들로 세상에 왔지만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비슈누(Vishnu)의 화신이다. 이는 기독교의 예수가 신(God)의 아들로 세상에 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바수데바는 쿤티의 오빠이므로 크리슈나와 판다바들은 서로 사촌 형제들이 되고, 카우라바들도 크리슈나의 친척이 된다. 판다바들과 카우라바들 사이에 전쟁이 임박하자 그들은 서로 야두(Yadu)족의 족장 크리슈나의 지원을 받고자 한다. 이에 크리슈나는 자기 부족의 군대와 자기 자신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아르주나는 자신의 전차 마부로 크리슈나를 선택하고 두료다나는 크리슈나의 군대를 얻게 된다.

드디어 판다바 형제들과 카우라바 형제들은 서로 대군을 이끌고 크룩세트라(Kurukshetra) 평원에서 대치한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아르주나는 두료다나의 진에 늘어선 무사들을 보고 극심한 심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는 집안의 할아버지 비슈마, 스승 드로나, 많은 사촌 형제들을 보고 온몸에 힘이 빠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활 간디바를 떨어뜨리며 크리슈나에게 고백한다. “저는 이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악과 불행만을 가져올 것입니다. 핏줄을 죽인 자가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족과 친구들을 죽이고 얻은 승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빼앗긴 왕국을 되찾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들을 본 순간 싸우려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저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저들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1:35)

이러한 고뇌와 번민에 대한 크리슈나의 답변은 명확하다. “싸워라(Fight)!(2:18) 만약 죽임을 당하면 그대는 하늘을 얻을 것이며, 승리하면 땅을 누릴 것이다. 그러니 싸움을 위해 결단하고 일어서라.(2:37)” 이 말에 아르주나는 놀란다. 우리도 “싸워야 한다”는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이니 그의 말은 곧 신(God)의 명령인데… 사실 대부분의 종교적 가르침은 싸움보다는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붓다는 살생 금지를 으뜸 계율로 삼았고, 예수도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산상수훈을 남겼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내적 갈등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갈파한다. 그는 우리가 삶과 우주 만물의 실체에 대한 진정한 앎(jnana; 知)에 이르면,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게 되면, 우리의 행위가 혈육을 죽이게 된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 『기타』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 즉 요가에 대한 담론이다. 산스크리트어 “yuj”에서 온 요가(yoga)라는 말은 멍에(yoke)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소에 멍에를 매듯이 “우리의 마음을 날뛰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매야 한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왜냐면 인간의 마음은 날뛰는 말(馬)처럼 각종 욕망과 충동에 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잘 제어할 수 있다면 이는 누구에게나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관건은 어떻게 마음을 제어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내가 누구인가, 나의 실체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기타』에 따르면 인간에 내재하는 불멸의 ‘참 나’란 아트만(ataman), 즉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자아(自我)이거나 정신(purusa), 또는 육신의 소유주(dehin)이다. 그러한 ‘참 나’는 생겨나지 않았으니 없어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영원한 것이다. 이에 현상의 변화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소멸하는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불변하는 만유(萬有)의 신적 존재이니까. 크리슈나는 “나의 것이라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아무런 갈망 없이 행하면 ‘거짓 나’(false ego)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평화에 이른다(2:71)”고 말한다. 요컨대 해탈의 경지란 ‘거짓 나’에서 벗어나 브라만(Brahman; 梵)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바로 범아일여(梵我一如)로 통한다.

요가는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지 않고, 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않는”(2:47) 행위(karma; 業)의 기술이므로 이 세상에서 잘된 일이나 잘못된 일을 모두 버림으로써 마음을 잘 제어해야 한다. “감각의 대상들을 생각하면 그것들에 대한 집착이 생기며, 집착에서 욕망이 생기고, 욕망에서 분노가 생긴다. 분노에서 미혹이 일어나고, 미혹에서 기억이 어지러워진다. 기억이 어지러워지면 지성이 파멸되고, 지성이 파멸되면 그는 다시 물질의 덫에 걸려든다.”(2:62~63) 즉, 윤회의 바다에 빠진다. 그러한 삶의 작동 원리를 바르게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욕망이라는 난적을 제어하고 집착에서 벗어나 고뇌와 번민이 없는 지고의 곳에 이른다. 이에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모든 행위를 나에게 맡기고 내 것이라는 생각조차 없이 싸워라!”(3:30)고 말한다.

만약 “아만(我慢)에 집착하여 싸우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그 결심은 그릇된 것이다.”(18:59) 왜냐면 그 행위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아의식이나 이기심 따위에 속박된 것이므로 내적 갈등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사의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싸우지 않으면, 즉 행동하지 않으면, 두려움 때문에 그 행위를 포기한 결과가 되니까. 우리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요가로 행위를 단념하고, 지혜로 의심을 끊어버리며, 자아에 머무는 자는 어떤 행위로도 속박할 수 없다.”(4:41) 행위 속에서 포기를 실천해야 한다. “요가로 제어되어 정결해진 자, 감각기관을 정복하여 자신을 이긴 자, 모든 존재의 자아가 된 자는 어떤 행위를 해도 더럽혀지지 않기”(5:7)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해야 할 의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렇게 “싸워야 한다”는, 즉 불의에 맞서 사회적 직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이는 카스트제도의 옹호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고, 공동체의 정치적 명분이나 이익이 개인의 권리나 이익에 우선하는 것으로도 들린다. 그럼에도 크리슈나는 “나는 모든 존재들에게 평등하며 나에게는 미운 자도 사랑하는 자도 없으니(9:29) 나에게 귀의하면 여자들, 바이샤들, 그리고 수드라들도 지고의 길을 가게 된다”(9:32)고 말한다. 『기타』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오로지 신을 신애하라!”라는 박티(bhakti; 信愛) 요가로 귀결된다. 박티는 죽음과 윤회의 바다를 건너는 수단이 되니까.

여기서 우리는 박티의 대상인 크리슈나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에 부딪친다. 이는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같다. 크리슈나는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답한다. “나는 모든 존재의 중심에 있는 자아이며, 나는 존재들의 처음이고 중간이고 바로 끝이다”(10:20)고 말한다. 이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다”(계시록 21:6)고 한 예수의 통찰과 통한다. 또한, 크리슈나가 세상에서 으뜸가는 수많은 것들을 자기 현현의 예로 열거하지만 그럼에도 아르주나의 궁금증은 끝나지 않는다. 이에 크리슈나는 잠시 아르주나에게 신적(神的) 눈을 갖게 한 뒤, 수많은 입과 눈을 가진, 만방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는, 너무 기이하고 두려워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그러한 모습으로 현현한다. 크리슈나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와 있지만 삶과 우주 만물을 주재하며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대자임을 방증하고자 한다.

그런 다음에 크리슈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잘 생각해보고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라(18:63)”고 아르주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다. 모든 존재에 거하는 주(主)을 귀의처로 삼고 지고의 평안에 이르는 일은 온전히 아르주나의 자유의지에 맡긴 것이다. 예수가 그런 것처럼 크리슈나도 아르주나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한 것은, 즉 신조차 인간의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지 않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니다. 왜냐면 자유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권을 갖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아르주나는 망설임을 떨쳐내고 다시 간디나를 집어 든다. 전투가 시작되지만 전쟁터에서도 무사는 자신의 행동규범을 지켜야 한다. 아직 싸울 준비가 안 된 적은 공격하지 말아야 하며, 날이 저물면 싸움을 멈춰야 한다. 이는 고대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무튼 그 치열한 18일간의 전쟁은 우여곡절 끝에 판다바들의 승리로 끝이 난다. 하지만 양군의 거의 모든 무사들이 죽음을 맞는다. 카우라바들과 쿠루 원로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고, 판다바들과 크리슈나 등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유디스티라는 왕으로 등극하여 36년간 나라를 다스린다. 그에 따른 수많은 이야기들은 기원전 15세기 무렵 북쪽에서 내려온 아리안족의 인도대륙 정착과정이 어떠했을까 가늠하게 한다.

크리슈나가 세상을 떠났을 때 판다바들도 이제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히말라야 순례길에서 드라우파디와 네 형제들이 하나씩 죽고, 동행하던 개와 유디스티라만 남는다. 유디슈티라도 천국의 문에 도착했을 때 “개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그는 “나도 개와 함께 밖에 머물겠다”며 들어서지 않는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자기를 믿고 따라온 자를 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제서야 동행한 개가 다르마의 화신, 즉 유디슈티라의 아버지로 밝혀진다. 유디스티라는 천국에서 들어선 후에도 자신의 형제들이 모두 지옥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그렇다면 나도 형제들이 있는 지옥에 머물겠다”고 말한다. 이는 천국에 머물 수 있는 유디스티라의 인성(人性)에 대한, 즉 왕이 지녀야 할 공동체의식이나 의무에 대한 마지막 시험으로 밝혀진다. 드라우파디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천국에 있었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 만물은 수레바퀴가 도는 것처럼 돌고 도는 것이지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문화적 관념이 깔려 있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크리슈나는 비슈누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왔고, 저승 순례길에 유디스티라와 동행했던 개 또한 다르마의 화신이었다. 그 사상의 저변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살아 있다. 이에 아트만이란 우주의 본질로서 그 형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만유의 본질인 ‘참 나’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있다는 그런 사상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사실 “윤리와 경제, 쾌락과 해탈의 영역에서 『마하바라타』에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대서사시에 없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곳에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에 이 18권짜리 대서사시가 고대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 전반을 망라하는 백과사전이라면 『기타』는 그 핵심 사상을 18장 700쉴로카의 시구(詩句)들로 압축하여 담아낸다. 요컨대 이 짧은 시구들은 삶과 죽음, 인간과 우주 만물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다.

『기타』의 철학적 통찰에는 분명 난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 시(詩)에는 우리네 세상에 대한 요가의 명상적 잠언들이 바늘처럼 삶의 정곡을 찌르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한 잠언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삶의 함의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의 어구도 그렇다. “모든 이들에게 어두운 밤은 스스로 제어된 자에게는 깨어 있는 시간이며, 모든 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은 자기 성찰적인 현자에게는 밤이다.” (2:69) (What is night for all beings is the time of awakening for the self-controlled; and the time of awakening for all beings is night for the introspective sage.)

§참고 문헌: 『바가바드 기타』(2014)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 기타』(1996) 함석헌 주석; 『Bhagavad-gῑtā As It Is』(1973) by Swami Prabhupada; 『Mahābhārata』(1998) by Krishna Dh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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