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삼국지’라고 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소설 『삼국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이는 명나라 초 나관중(羅貫中)의 원작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나 그에 기반한 소설, 창극, 디지털 게임 등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이미지들이 우리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삼국지(三國志)』(285)는 진수(陳壽)가 서진(西晉) 통일 이후 5년만에 중국의 삼국시대 90년간(190~280년)을 다룬 역사서이지 소설이 아니다. 이중톈(易中天)의 『삼국지강의(원제: 品三國)』는 진수의 『삼국지』와 여러 역사서들을 바탕으로 위ㆍ오ㆍ촉 삼국의 정사(正史)를 다루며 소설이나 창극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을 적나라하게 분석한다. 그는 그러한 이미지들이 역사적 사실과 어떤 괴리가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이중톈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세 가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첫째, 정사에 기록된 역사상의 이미지들로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상의 이미지들도 역사의 진상(眞相)과 꼭 같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진수의 『삼국지』에 들어있는 유비의 촉한(蜀漢)에 대한 기록들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것’에다가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보탠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촉한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역사의 진실일 수 없다. 설혹 나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바로 그 사건의 진상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본 것과 다를 수 있으니까.

둘째, 문학상의 역사적 이미지들로 소설이나 창극 속에서 형상화되는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조조나 제갈량의 모습을 들 수 있다. 조조는 천하에 둘도 없는 간신이거나 난세의 간웅으로 그려지고 제갈량은 수많은 전술과 용병의 달인으로 형상화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청년 조조의 기개와 충정은 과소평가할 수 없고, 제갈량은 실제로 군사 분야보다는 외교나 정치에서 더 뛰어난 수완을 보였기 때문이다. 셋째, 민간의 역사적 이미지들로 일반 민중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어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 그런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모습이다. 각종 민간 전설, 민간 풍속, 민간 신앙 또는 개개인의 생각들도 이러한 역사적 이미지에 포함된다.

역사에 대한 민간의 이미지와 문학상의 이미지는 공통점이 있다. 즉,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점이 그렇다. 이를테면 적을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렸다는 공성계(空城計)나 풀을 실은 배로 화살을 구했다는 『삼국지연의』의 이야기도 실제로는 제갈량의 이미지를 지나치게 미화해서 생겨난 허구이다. 이중톈의 강의는 이러한 문학상의 또는 민간의 역사적 이미지들 속에 숨어있는 왜곡된 모습들을 가능한 한 합리적인 추론과 고증으로 걸러내고, 그 자리에 누락되거나 배제됐던 사실들의 제 모습들을 보완해 넣음으로써 좀 더 진실에 근접한 역사의 본 얼굴을 제시하고자 한다.

후세에 조조가 음흉하고 간교한 인물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 이유 중의 하나는 친구 여백사(呂伯奢)를 죽인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조는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고향으로 도망치는 길에 여백사의 집에 투숙한다. 집안에서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었지만 조조는 그 칼 가는 것이 자신을 죽이려는 준비라고 의심하여 여백사와 그의 가족을 몰살하고 만다. 그런 다음에 그는 선량한 사람들을 죽였음을 깨닫고 처참한 심경으로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억지로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변호한다. 물론 이런 변호가 그의 죄과를 씻을 수 없다. 문제는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런 내용이 대폭 수정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처참해 하는 심경은 사라지고 “내가 천하 사람들을 배신할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 않겠다”로 바뀐다. 즉, 조조는 한 가족의 원수에서 천하 모든 사람들의 공적(公賊)으로 매도된 것이다.

또한, 이중톈의 강의는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담겨 있을 숨은 이야기도 끄집어낸다. 1800여년 전 유비가 오늘날 우리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정말 세 번 제갈량을 찾아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삼고초려설을 택하여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집을 세 차례 방문했다고 기술하지만 『위략』과 『구주춘추』에서는 제갈량이 주동적으로 유비를 만나러 갔다고 하는 자천(自薦)설을 택한다. 이에 이중톈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분석한다. 제갈량이 출사했던 건안 12년(207년)에 유비는 이미 6년 이상 형주에 머물고 있었고, 당시 46세의 유비(161~223)는 26세의 제갈량(181~234)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많았다.

유비가 형주에 머문 그 6년이라는 기간과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 기간 중에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제갈량처럼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영재가 누군가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그냥 초야에 묵혀 있을 리가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펼칠 주인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유비도 또한 제갈량이 관중과 악의에 비견된다는 사마휘와 서서의 평가를 믿어도 될까 하고 따져봤을 것이다. 이에 그의 삼고초려는 표면적으로는 어진 이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현장조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삼국지연의』에서 말하는 유비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이 엮어낸 소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나관중의 드라마틱한 각색을 통해서 유비의 삼고초려는 인재 초빙의 모범사례로 둔갑하고 우리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다.

이중톈의 강의는 삼국시대의 3대 전쟁, 즉 관도대전(200년)과 적벽대전(208년), 그리고 이릉대전(221~222년)의 배경과 원인도 상세하게 다룬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세 전쟁이 모두 전쟁을 일으킨 쪽의 패배로 끝이 났다는 점이다. 관도대전은 원소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약세였던 조조가 승리를 거두고 중원의 패자로 올라섰다. 적벽대전은 천하통일의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를 차지하려고 조조가 일으켰던 전쟁이지만 오히려 약세였던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승리를 거머쥐게 되고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는 계기가 됐다. 이릉대전도 유비가 빼앗긴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하려고 시작했던 전쟁이지만 손권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렇게 전쟁을 일으킨 쪽이 모두 패했다는 점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또한, 유비는 221년 황제로 등극할 즈음 노년의 조조가 그랬던 것처럼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권력자로 변했다. 이러한 변화는 손권에게도 일어났다. 손권은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손중모 같아야 한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너그럽고 겸손한, 그리고 감정 컨트롤도 잘하는 청년 영웅이었지만 노년에는 권력에 취한, 의심 많는, 정적은 물론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그런 인물로 변했다. 이에 이중톈의 강의는 삼국시대의 세 권력자가 왜 그렇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권력의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들에게 잠재돼 있던 본성의 발현이었을까?

『삼국지강의』는 이중톈이 중국 CCTV의 ‘백가강단’에서 48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여기서 그는 여러 역사서들과 『삼국지연의』나 창극에 담긴 삼국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조망한다. 역사를 조망할 때 중요한 것은 역사의 서술이나 조망에 담긴 함의를 꿰뚫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누가 어느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든 그 기술에는 시대 상황이나 기록자의 가치관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기술하려고 해도 그 기록자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 중에서 적어도 취사선택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의 조망은 당사자의 가치관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 간과하면 한 걸음 더 역사의 진실 속으로 다가서는 일은 오히려 진실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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