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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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변을 보고 돌아서려다가 깜짝 놀랐다. 변기에 채워졌던 물이 벌겋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일에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은 답답해졌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까스로 진정을 하고 지난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동안 과로한 날이 많았고 검도대회 참가를 위해서 연습량을 늘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동네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며칠 후에 오라고 한다. 약속 날짜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진찰을 받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차례가 되어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간호사가 갖다 놓은 차트를 들여다보며 검사상으로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한꺼번에 많은 양의 피가 나왔다면 좀더 큰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단다. 말이라는 게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3차 진료기관으로 가 보라는 의사의 말은 내겐 불안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곧바로 종합병원으로 갔다. 접수하고 진료를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의사를 만나서 증세를 얘기하고 그 곳까지 온 경위도 설명했다. 의사는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니 소변 검사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결과는 열흘 후에 나온다니 기다릴 수밖에.

집에 돌아오면서도 내내 혹시 큰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모든 생각이 불길한 쪽으로 맞춰진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부러움이 가득했다. 밤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고 낮에는 계속해서 피로가 누적되었다. 지난 세월 속에 묻혀 있던 아쉬웠던 일들이 살아 움직인다. 잘 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근심의 긴 터널을 지나서 검사 결과가 나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준비를 하고 병원에 갔다. 세상 사람이 다 아파 보일 정도로 병원에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진다. 잠깐 사이였지만 서로의 병세를 묻기도 하며 동정을 보내기도 한다. 대기실에서 기다린 30분은 내가 살아온 지난날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삶의 그림자가 이렇게 진하게 느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림자는 밝은 빛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은혜의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자위해 보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동안 이번 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걱정거리를 안겨 주어서 미안했는데 아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 아침만 해도 혼자 병원을 간다고 하니까 그럴 수는 없다면서 초조하게 따라나서지 않았던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 초점이 맞춰진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진료실로 들어갔다. 전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사의 표정부터 살폈다. 의사는 차트를 보면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그러더니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그 동안 너무 지나치게 운동하셨습니다. 과도하게 운동을 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소변 색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앞으로는 적당히 운동을 하십시오.” 순간 온 세상을 다시 얻은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내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가와서 두 손을 꼭 잡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묻는다. 대기실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느냐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목발을 짚고 복도로 걸어가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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