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가을은 참 괴롭다, 하루하루가.’

잠시 밖에 나가는 일조차 머뭇거리게 할 만큼 유별나게 더웠던 지난여름, 이제는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야외활동을 즐기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을은 참으로 고통스런 계절이다. 환절기만 되면 비염 증상이 심해 재채기, 눈물, 콧물은 물론 눈살까지 가려우니 한시도 일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염은 대인관계에서도 불편한 점이 많다. 재채기할 때마다 주위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코를 훌쩍거리는 일조차 눈치를 봐가며 해야 한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비염의 고통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코에 염증이 있는 증상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니 앓는 사람만 힘들 뿐이다.

오늘은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한 날이다. 새벽녘에 재채기가 심하게 나고 콧물이 흘러서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아파트 단지 내 다른 집에 불이 켜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까만 하늘 저편에서 별들이 도란도란 속삭이며 나에게 따스하고 평화로운 기운을 전해온다. 말간 콧물이 다시 흐르고 머리가 먹먹해질 무렵 밤하늘에 떠 있던 작은 별 하나가 빠르게 사라진다. 나는 어둠으로 지워진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별똥별과 비염은 서로 상관관계가 없음에도 유성을 보며 내 안의 부정한 것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그 궤적을 좇고 있었나 보다.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모처럼 느끼는 밤 분위기가 좋았다. 그동안 잠 때문에 잊고 지내왔던 어둠의 세계를 조금 더 가까이서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새벽 별빛은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더욱 반짝였다.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가는데 객실 안에서 다시 재채기가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분체는 멈출 줄 모르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50대 중반의 여자가 다가와서는 휴지를 건네준다. 그 사이 그 여자가 앉아있던 자리는 다른 사람 차지가 되었고 그 여자는 서서 가야 했다. 몸과 마음은 재채기에 반응하느라 힘이 들었지만 나는 미안한 마음에 목적지인 신촌역 바로 전 역에서 하차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접수를 마치고 진료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낯설지 않은 사람이 옆자리에 앉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열차 안에서 내게 휴지를 건네준 여자였다. 참 묘한 인연이다. 그 여자도 이내 나를 알아보고는 가볍게 웃음을 짓는다. 그 역시 콧병이 있어서 병원에 다닌다고 했다. 그의 병은 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병원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울감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막상 이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나의 병은 한갓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벼운 증세였다. 진료를 마치고 귀가하기 전, 붉게 물들어 가는 대학 캠퍼스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단풍이 예쁘게 물든 교정, 젊은이들의 화사한 모습과 가벼운 발걸음이 가을풍경과 멋지게 어우러져 조화의 미를 만들어낸다. 얼핏 보기에 단풍은 성장의 끝점에 있고 젊음은 성장의 출발 선상에 있으니 서로 어색할 것 같은데도 그들은 자연스레 어울렸다. 자연계의 순환 과정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는 본디의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이니 앞뒤 순서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도 그들과 함께 걸었다. 자연과 하나 되고 젊음과 하나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오늘 하루 행복을 충분히 보상받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와 나들이 나온 듯, 어린아이가 가을꽃 앞에서 꽃과 같은 표정을 짓는다. 꽃이 아름다운 것인지, 꽃을 보는 마음이 아름다운 것인지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꽃이 아름다우니 꽃을 보는 마음이 아름다워질 테고 꽃을 보는 마음이 아름다우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동감이 넘치는 교정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만남, 이들의 멋진 모습은 석양빛에 더욱 빛나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는 기분이 좋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왔다. 보통 때는 좀체 느낄 수 없었던 여유로운 감정, 시간과 공간과 여러 가지 일이 어우러진 하루는 나의 마음을 신비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세상일이란 좋은 일 끝에 궂은일이 있을 수 있고, 궂은일 끝에 좋은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삶이 아닐까 싶다. 눈꺼풀 속으로 지난 하루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듯했는데 어느새 목적지까지 다 왔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늘 같은 상황에 전해지는 방송 언어였지만 오늘만은 좀 다르게 들려온다.

‘가을은 참 예쁘다, 하루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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